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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Jan 19. 2019

# 59. 많이 사주고 간섭하지 않는다


제제가 커다란 바구니를 끌고 거실로 나왔다. 바구니에는 자동차 장난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나름 실제 자동차를 모델로 삼아 정교하게 만들어진 다이캐스트인데 제제에게는 그런 것들이 제법 많다. 전부 꺼내는 데만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헥헥거리며 힘들어했지만 제제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하다.

"아빠, 나는 자동차 부자야."

"하하하, 우리 제제 진짜 멋진데!"

많이 사준다.  

구태여 세세한 품목을 요구하거나 조르지 않아도 관심을 갖고 있구나 생각이 들면 넉넉하게 준비했다가 선물로 준다. 자동차가 한 개일 때와 백 개일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놀이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다. 사고력이나 창의성 같은 멋진 단어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라 그냥 많이 가지고 노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다는 이야기다.

간섭을 하지 않는다.

제제가 본인의 의지로 놀이를 할 때는 따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편이다. 가끔 의중을 묻고 도로를 연결해서 준비하기도 하고 블록으로 주차장을 만들어주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간섭하는 일은 드물다.

놀이를 하는데 필요한 제반 장치를 구성해주는 건 아빠가 할 일이 맞다. 제제가 원한다면 당연히 함께 놀이에 임해야 함은 물론이다. 다만 아이의 놀이는 아이가 결정하고 진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에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의 놀이를 재단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많이 사주고 간섭을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또 있다. 이유를 찾으려면 넉넉잡아 한 35년 정도 거꾸로 시간을 돌리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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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블록 장난감을 좋아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좋아하는 장난감을 한 번 잡으면 지칠 줄 모르고 오랜 시간 놀이에 열중하곤 했다. 블록을 한 번에 펼쳐놓은 후, 쌓거나 이어보며 내가 생각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게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점차 만족도가 떨어졌다.  

정해진 숫자의 블록을 가지고 구현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이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블록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아이가 원한다면, 가능한 선에서 부모가 얼마든지 추가로 블록을 사줄 수 있지만 그때는 달랐다. 동네 문구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제품엔 한계가 있었고 백화점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게다가 특정한 모양의 블록을 따로 판매하는 경우도 없었다.

수백만 개의 블록을 깔아놓고 헤엄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엔, 쌓고 이어가고 더 쌓고 길게 이어가다가 내가 지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할 만큼 블록이 많았다. 지나고 보니 그건 일종의 갈증이었던 것 같다.  

그냥 많이 갖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아이는 놀이에 흥미를 잃기 마련이다. 남은 절반쯤의 흥미를 없애는 데는 주변 어른들의 공이 컸다.  

가끔 집에 놀러 오는 친척 어른이나 아버지의 직장 후배들은 무턱대고 무언가를 요구하곤 했다. 정작 내 부모는 내 놀이에 대해 일언반구 간섭이 없었는데 희한하게도 그들은 늘 그랬다.  

이걸 만들어 봐라, 저건 왜 저렇게 만들었느냐에서 그치지 않았을뿐더러 심지어 내가 만들어 놓은 구조물을 부수고 자신이 대신 만들어주겠다고 나서는 이도 있었다. 내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랬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런 일이 쌓이면서 나는 블록을 손에서 놓았다.  

그냥 간섭받는 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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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우리 고속도로 놀이하자."

"응, 그래. 잠시만 기다려. 아빠가 빨리 준비할게."

35년 전 기억에서 돌아와 다시 현실이다. 장난감 방에 들어가 여러 가지 조립식 도로를 집어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도로를 잇고 통행료를 받을 시설을 만든다. 본부를 세우고 주차장 공간을 곁들이면 얼추 준비는 끝이다.  

"아빠가 경찰차 해. 나는 빨리 달리는 스포츠카 할게. 내가 나쁜 행동을 하면 경찰 헬리콥터랑 경찰차가 동시에 나를 잡으러 와야 해."

다양한 자동차가 거실 바닥에 가득이다. 거실이 고속도로로 변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영화는 시작되고 으르렁거리는 엔진음을 내며 스포츠카가 끝없이 뻗은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아빠, 지금이야."

추격전 씬이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고속도로를 달리고 나는 무전기를 잡은 경찰처럼 본부에 보고한다. 고속도로에 과속 차량이 있다는 무전을 받은 본부에서 헬리콥터를 띄운다. 경찰차와 경찰 헬리콥터가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과속차량을 추격하고 어느새 도로의 끝부분에는 다른 경찰차가 소방차와 구급차까지 동원해서 길을 막고 있다.

"너는 포위됐다."

멋들어지게 대사를 치고 나서야 추격전은 끝이 나고 해당 차량을 본부로 압송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렸다. 어찌나 배역에 충실했는지 제제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고 내 상의는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다.

"제제, 고속도로 놀이 한 번 더 할까?"

"아빠, 이번에는 교통신호 지키기 놀이."

언제나 새로운 제제의 제안에 우리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비록 땀방울은 줄줄 흐르지만 35년을 두고 비로소 나의 놀이가 완성된 느낌이다.

"그래, 좋아."

요즘 우리집 거실엔 다섯살 제제와, 아홉 살로 돌아간 마흔넷 마이클이, 함께 어울려 놀이에 한창이다.
 

얼마 전, 제제는 외할아버지께 선물을 받았어요. 일명 '지프차'라고 불리는 오프로드 자동차 다이캐스트였습니다.
제제는 캐릭터 장난감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뿐만 아니라 동물, 공룡, 곤충... 뭐든지 실사를 기반으로 만든 걸 좋아해요.


멋지죠? 본가나 처가 어른들을 비롯해서 제제의 이모나 고모는 제제에게 참 많은 장난감을 선물했어요. 제제는 복이 참 많죠.
슈퍼카들도 많아요. 이런 게 얼마나 좋은 것들인지 제제가 아직 가치를 알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_+ 제제야, 아빠 한 대만 줄래?
그냥 많이 사주고, 간섭하지 않습니다. 제 어릴 때 기억 때문에 장난감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고 간섭은 적으면 적을 수록 좋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많이 사주고, 제제가 원하지 않으면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게 합니다. 물론 도움을 청하거나 함께 놀자 하면 언제든지 대환영이죠.
맨날 영화감독처럼 아빠한테 배역을 주고 이것저것 시켜대는 통에 아주 귀찮지만... 그래도 함께 놀 때면 언제나 즐겁습니다.
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함께 노는 우리는....
세상 둘도 없는 친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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