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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Jan 21. 2019

# 62. 딸기는 바나나 색깔이야

지난 10월의 어느 오후,  

제제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바람에 찬 기운이 제법 섞이기 시작했다. 그쯤 되면 늘 보던 익숙한 풍경도 배고픔을 덧칠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무는 갈증을 호소하며 말라가는 가지를 절규하듯 내밀고, 푸석푸석한 화단의 풀은 궁기가 차올라 힘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하루 건너 씩 보이는 안개는 그나마 남은 지면의 생기를 남김없이 뽑아 어딘가로 날려 보낼 기세다. 

주위를 살피다가 함께 걷는 제제를 돌아보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생기 넘치는 건 제제다. 아기 병아리가 쉼 없이 삐약거리는 모습처럼 샛노란 점퍼를 입은 제제는 걸음걸음마다 맑고 밝은 기운을 주변에 흩뿌리고 있었다. 

"제제, 노란 점퍼가 참 잘 어울려." 

"나 바나나 같아?"  

배시시 웃는 제제의 모습이 좋았다. 보이는 대부분의 것들은 본래의 색을 잃고 있는데 녀석은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하게 색감을 드러내고 있다. 눈꼬리가 처지면서 절로 웃음이 났다. 아마도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하회탈 못지않은 표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바나나처럼 아주 예쁜 노란색이야."  

"아빠, 그런데 딸기도 바나나 색깔인 거 알아?" 

"응? 뭐라고?" 

또 노란 병아리는 아빠가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달아난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하고픈 건지, 마흔셋 아빠도 부지런히 병아리의 뒤를 쫓아야 한다.(2018년엔 마흔셋이었어요.^^;;) 딸기와 바나나를 연결할 수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내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빠, 딸기도 바나나 색깔이라니까."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딸기는 빨간색이고 점이 콕콕 있잖아. 바나나는 노란색이고." 

제제가 아기였을 때부터, 우리는 줄곧 눈을 맞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기 시작하는 백일 무렵부터 지금껏 그래 왔으니, 제제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엔 언제나 아빠가 함께였던 셈이다.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지난 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제는 항상 내 시선이 미치는 곳에 존재했다.  

서로의 시선에 담긴 우리는 많은 걸 함께 했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자 각자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가장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엔 그런 것도 다 무용지물이다. 딸기가 바나나 색깔이라는데 내 머리가 굳어버린 건지 도무지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다만 하나 알 수 있는 거라곤 제제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뿐이다. 분명 제제는 표정에 진지함을 담아 말했다. 

다른 방향으로 화제가 넘어가고, 함께 걸으며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좀처럼 의문점은 가시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집에 돌아와 제제의 외투를 벗겨주는 순간까지도 주기적으로 바나나? 딸기? 바나나? 딸기? 두 단어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제, 딸기가 바나나 색깔이랑 같다는 거지?" 

"응, 맞아." 

챙겨나갔던 가방을 정리하고 제제와 냉장고 앞에 섰다. 마지막까지 질문을 거듭했음에도 딸기는 바나나 색깔이라는 제제에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를 확실히 알아볼 시간이다. 과일, 채소 박스를 열어 바나나와 딸기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막상 딸기를 꺼내놓으니 과육과 꽃받침 사이 딸기 윗부분에 하얀색이 보인다. 아, 이걸 말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아무리 노르스름하다 치더라도 바나나 색깔이라기보다는 하얀 편에 가깝다.  

"제제, 딸기랑 바나나가 여기 있어.
정말 딸기가 바나나 색깔이야? 

제제의 생각을 재차 물었다. 제제는 의자에 올라 식탁 위를 살피더니, 예상대로 딸기의 윗부분을 가리키며 바나나 색깔이라고 말했다. 그걸 바나나 색깔이라고 부르는 건 억지에 가깝다고 대꾸하자 제제는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바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나나 껍질을 벗겼다. 

"이것 봐, 딸기랑 색깔이 똑같지?" 

생각을 다시 해보니 그렇다. 제제는 한 번도 딸기가 노란색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나나 껍질과 같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다. 그저 계속 바나나 색깔이라고 반복했을 뿐이다.  
 
바나나 껍질을 벗겨준 제제 덕분에 바나나 과육의 색을 딸기랑 비교해보니, 딸기 꽃받침 부근의 색깔이 그것과 비슷하다. 그제야 나는 딸기가 바나나 색깔이라는 제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제, 아빠가 빨리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런데 이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딸기는 원래 바나나 색깔이야." 

지난 10월 이후로,
나는 딸기를 바나나 색깔이라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아빠, 내 옷이 바나나처럼 예뻐?


근데, 딸기도 바나나 색깔이야. 아빠도 알아?
재차 질문을 해도 제제는 진짜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산책을 마칠 때까지 몇 번을 더 물어봐도 마찬가지였죠.
집에 가면 내가 보여줄게.


생각해보니 제제는 딸기가 노란색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바나나 색깔이라고 했는데 껍질 색깔이라고 하지도 않았죠. 딸기의 이 부분과...


바나나의 이 부분이 서로 비슷하다고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ㅎㅎㅎ 진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딸기엔 바나나 색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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