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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Jan 25. 2019

# 07. 연애시절

# 2014년 가을의 어느 날


07:40
 
준비를 마쳤으니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부지런히 걸어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모란역으로 향했다. 모란역에서 지하철로 환승한 후에 분당에 위치한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직 출발 시간에 여유가 있다. 승차권을 발권하고 마실 것을 몇 가지 준비했다. 책은 가방에 충분하니 신문을 한 부 샀다.
 
09:00
 
고속버스가 출발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참 곱다.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한 편이다. 네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것 같다. 커튼을 펼쳐 햇빛을 가리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음악을 틀고 몸을 의자에 바싹 기대니 여기가 바로 낙원이다.
 
12:50
 
버스가 터미널에 들어섰다. 창문 너머로 하차장 앞에 제니스가 보인다. 생각보다 조금 이른 시각인데 이미 터미널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크게 흔드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집을 나선 시각부터 정확하게 다섯 시간 십 분 만에 그녀를 만났다.
 
14:00
 
시장기가 제법일 때, 팝콘은 어떤 음식과도 견주기 힘들 만큼 맛있다. 영화 상영시간을 기다리며 한 움큼씩 입에 털어 넣었더니 이미 커다란 용기에 수북하던 것이 절반도 남지 않았다. 제니스와 마주 잡은 한 손이랑 팝콘을 들고 있는 한 손, 두 손 모두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팝콘은 어느 손으로 먹었지?
 
18:00
 
영화가 끝나고 김해시 진영 신도시로 자리를 옮겼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들린다. 제니스가 구워주는 고기는 등급을 따질 필요가 없다. 대충 붉은 기운만 사라지면 입에 주워 담고 우물거리는데 기막힌 맛이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그녀가 있고, 그녀 앞에서 소주 한 잔에 두 점씩 고기를 씹는 호사를 누리다 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22:05
 
버스가 승차장을 떠나고 터미널을 벗어날 때까지 제니스는 창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도착할 땐, 환한 미소와 함께 크게 흔들던 반가움의 손이었다. 헤어져야 하는 깊은 밤, 작게 흔드는 그 손에는 낮과는 정반대의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버스는 이내 고속도로에 오르고 살큼 취기가 올라 기분 좋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가로등 불빛을 지켜보다가 어느새 스르륵 눈을 감았다.
 
01:35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터미널엔 인적이 드물다. 휴대전화를 들어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답장이 온다. 안전하게 귀가할 테니 염려 말고 잠자리에 들라는 메시지를 다시 보내고 그제야 택시를 타기 위해 도롯가로 향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경기도 광주로 들어가는 길, 긴 하루가 이제야 마무리되는 기분이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02:20
 
18시간 40분 만에 다시금 집이다. 꼬박 하루를 바삐 움직인 셈이다. 가방을 정리하고 주방에서 간단히 맥주 몇 캔을 챙겨 조용히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맥주 한 모금을 삼키니 찌르르 배가 울리고 이내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맴돈다.
 
03:40
 
쌓인 피로는 내가 그녀를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고, 긴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니 감수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고 싶지만 자주 볼 수 없어 아쉬울 때는, 그녀도 나와 같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매끄러워진다.
 
홀로 다닐 때 더욱 행실이 단정한 사람, 늘 함께이진 않지만 그리움을 쌓으며 더욱 강해지는 사람, 애틋한 마음을 차곡차곡 담아두었다가 만날 때 말없이 꼭 안아주는 사람..., 그게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침대에 길게 누워 방 천장을 보며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2014년 가을,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제니스를 만나러 갔어요.


고속버스로 4시간이 걸리는 거리지만 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편하게 입고 필요한 걸 챙긴 후에, 보고픈 마음만 잘 추스르며 가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죠.
보통 교통편 이용시간만 왕복 열 시간 정도였어요.
아내가 사는 곳까지 찾아갈 때는, 기차도 이용해야 하니까 왕복 열 시간에, 두 시간을 추가하면 됩니다.
그래도 마냥 좋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보고 싶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그저 버스나 기차만 타면 되니까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한 후에 야경을 감상하는 게 전부였지만 참 좋았어요.
돌아와야 하는 시간은 언제나 금세 찾아옵니다.
그러면 그녀는 아쉬움을 담아 손을 흔들어 주었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제 가슴에 선명하게 각인이 됐어요. 아마 평생 떠올릴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려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단정한 마음가짐이 됩니다.
긴 하루를 보냈지만 지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기운을 담아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죠. 2014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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