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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Kay Jan 05. 2019

# 04. 오늘의 페이지

제제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알레르기반응 여부를 살피느라 하루, 한 달, 분기를 나누어 모든 식재료를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태어난 이후, 빠짐없이 페이지를 채워나가던 노트는 그렇게 점점 빼곡히 차오르는 글씨들로 인해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태가 됐음은 물론이다. 


잠은 얼마나 잤는지, 변 상태가 어떠한지는 물론이고 약간의 열이라도 있다 싶으면 매시간 체온까지도 꼬박 적었는데 귀찮거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볼펜 잉크로 무거워진 노트가 부담스럽다며 깊은 밤에 어디로 몰래 달아나지는 않을까 상상한 적은 있다.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면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변이 갑자기 무르면 왜 그런지 쉽게 파악하기 위해 매일 적던 노트 덕분에, 나는 제제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의 염분량까지도 달달 외울 수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동네 곳곳에 위치한 마트 별, 같은 식재료 단가까지도 줄줄 꿰는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  
 
아내가 시간 날 때 확인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그날 하루를 기록한 노트 한 장을 사진에 담아 매일 오후에 보냈다. 나는 가정주부니까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리하고, 아내가 밖에서 일하면서 놀랄만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식 웃음이 나는 이야기인데, 나는 당시에 꽤 필사적이다. 글씨로 따지자면 '궁서체'같은 굉장히 진지한 나날을 보냈달까.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이제는 노트가 여덟 권째다. 
 
지금은 노트에 적는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
음식의 종류나 양보다 어떤 먹거리를 선호하는지 반응을 살피고, 오늘 컨디션은 어떤지, 집안 기온이나 습도에 따라 땀을 얼마나 흘리는지 또는 놀이방식이나 관심사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노트는 아마 아홉 권, 열 권, 그 이후로도 계속될 것 같다. 제제에 대한 기록이긴 하지만 거기엔, 그날 우리 가족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니까 말이다.
 
오늘 새벽, 여덟 번째 노트에서 오늘의 페이지를 열었다. 오늘의 날짜와 제제가 태어난지 며칠이 됐는지를 적고 운동하러 집을 나섰다. 
 
한 페이지가 다시 시작된 셈이다.

그저 열심히 기록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초보아빠이고 아빠육아를 해야했기 때문에 적고 또 적었습니다. 혹시 부족한 점이 있을까, 무언가를 실수하지는 않을까 염려했지요.


제제가 태어나고 매일매일 적던 노트가 지금은 8권이 되었어요. 노트 한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그날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쌓여가는 노트 안에는 우리 가족의 하루 하루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노트는 늘어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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