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쇠 말고요.
처음 회사에 왔을 때 느꼈던 기대감은 가뭇없이 사라지는 듯하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다. 회사는 나를 믿지 않는다. 물론 나도 믿을 이유를 줘야 한다. 업무 성과와 지표로 커뮤니케이션 해야한다. 나아가, 요즘은 '브랜드'까지 원한다. 기업이 하는 것처럼 직원도 전문가로서 브랜딩을 해야한다는게 골자다. 직접 이야기하지 않아도, 요즘 분위기가 그렇다.
궁극적으로는 좋은 일이다. 성과 지표 안에만 머물러 있는게 아니라 탄력적인 경력관리도 가능하고, 오너쉽을 찾기도 쉽다. 회사도 좋은 점이 있다. 맡은 바 소임을 다 하면서(기본), 기획을 통해 성장을 이끌어 낼 분기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네트워킹도 열심히 하면서 업계 인싸가 되서 회사의 밸류를 올려주길 원한다. 시키는 것만 하는 주니어가 아니니, 전략과 기획, 실행과 분석 까지 업무의 싸이클을 돌려서 동력을 만들어 주길 원한다.
그런데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많은 이가 80점짜리 제품으로 90점의 평판을 얻는 것을 브랜딩이라고 생각한다. 즉, 좋은 것을 만들려는 노력은 뒷전이고 ‘더 좋아 보이게 하는 것’을 브랜딩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브랜딩이란 가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들어 그것으로써 좋은 평판과 신뢰를 얻는 것이 본질이다. 또 장기적으로 가치를 쌓아가겠다는 발상이 전제다. 같은 성과로 당장 더 좋은 평판을 얻어 내는 게 브랜딩은 아니란 뜻이다.
최인아, 당신이 브랜드다 (동아신문 2019.06.15)
나를 브랜드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직을 고민하던 시기 부터 였다. 경영진이나 다른 회사 의사결정권자에게 실제 나보다 '좋아보이게 포장'하는 건 의미가 없고, 내가 정말 뭐하는 사람이고 어떤 가치를 가져오는지 증명할 수 없다면 계속 지금처럼 휩쓸려 다니겠구나라는 위기의식이 퍼뜩 들었다. 장기적으로 가치를 쌓아가겠다는 발상을 전제로 하고 자신의 판단과 행동의 준거로 삼아, 업무 단위(task)에 일회일비하지 않고 단단한 전문인이 될 판을 짜야겠다는 궁리도 했다.
새로운 회사에서 5개월에 접어드는 현재 시점, 나는 아직 거친 생각과 불안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셀프-톺아보기를 위해 셀프-조언을 해보고자 한다. 약간의 회상을 덧붙여 자양분도 삼고.
잃어버린 1년
무슨 일이 던 '경험'을 해보라는 조언 보다, 어떤 일이 던 '열심히' 해보라는 말 보다 지금 어디쯤에 위치해서 어떤 방향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파악해가면서, 피드백도 받고 배우면서 어느 궤도 위로 뛰울 만한 전문성을 찾았어야 했다.
나는 회사의 어지러운 상황이나 매일 닥치는 마감, 상사나 다른 부서와의 신경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여유를 찾아야 했다. 역량이 뛰어 났던 팀의 덕을 많이 보고, 업무에 절대적인 시간을 많이 투자했으며, 성과에 대한 조직적 압박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미숙함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야근을 반복해도 남는 건 무식하게 많은 업무량, 큰소리라도 칠 수 있게된 인성 단련, 어떤 일이던 처리하는 마당쇠 근성.
그냥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월급만큼 해맑게 일하면서 메타분석을 열심히 하면서 모색을 병행했어야 했는데... 여유를 가지면 뒤쳐져서 죽을 것 같았다. 다들 맹렬하게 사는 데 늦게 시작한 내가 지금 멈춰선 안된다는 생각에 주말에도 일을 하고, 업무에 관련된 책과 강의를 찾아다니면서 더욱 바쁘게 몰아쳤다.
요즘은 업무역량이 욕심이 나면서도, 똑같은 중량으로 '이 일을 정말 하고 싶은가'라는 원론적인 고민이 든다. 조직의 전략이 변할 때 마다 아이디어는 또 열심히 내서, 계속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서 집중해서 도전하는 기간 이 후에는 계약에 없었던 일까지 처리하느라 허덕이는 나를 발견했다. 일하면서 만났던 능력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모순이 없었다. 고뇌도 없고. 큰 맥락에서 개인적인 이해와 조직의 기대가 조화로와 감정적인 소비와 의심의 덫에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No'라는 말도 잘한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어필도 잘한다.
당신이 브랜드다
앞서 인용했던 최인아님의 칼럼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평판을 얻을까'에서 '나는 어떤 가치를 내놓고 있을까'로 전환되는 셀프-브랜딩을 제안한다. '냉정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로 삼고 정진하라는 뜻이고, 인정을 받으려면 먼저 내가 내놓는 가치가 제대로여야한다는 현실도 일깨워준다. 브랜드가 되고 싶다는 말은 나를 제대로 알고 싶고, 사람들에게도 오해나 평가절하 받지 않고 꾸준히 쌓아 올릴 수 있는 전문성을 인정 받고 싶다는 나의 욕망을 감지했다.
나아가 너무 바빠 자기 브랜드를 만들지 못할 때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잠들고, 뒤쳐진다는 생각에 다시 잠에서 깬다. 일 고민으로 악몽도 꾸고, 자기 브랜드가 있는 직장인들의 비결이 뭘까 유튜브나 브런치를 뒤적거리다가 까무룩 겨우 잠을 잔다. 나를 책임 질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사이드 프로젝트도 기웃거리고, 글쓰기 강습도 듣고, 브런치도 시작하고, 유튜브 장비도 검색해보지만 퇴근 뒤에도 컴퓨터를 켜고 하루 두배 일하는 느낌은, 그닥, 건강하진 않은 것 같다.
요즘 셀프 브랜딩을 하기 위해서 '나의 강점 찾기 워크숍', '커리어패스 스토리텔링', '커리어 컨설팅' 등 다양한 서비스가 생기고 있다. 브랜드는 외부 전문가의 손을 빌어야만 만들 수 있을까? 왜?라고 묻는 게 정말 중요하다. 어떤 일을 하거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왜?"라고 물으면 대개 얼버무린다. 스티브 잡스 전기나 다른 창업가의 유튜브, 잘나가는 마케터의 워크샵에서 들은 말, 멘토가 했던 말,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의해서 브랜드를 고민하면 정작 '나'는 사라진다.
기록하기=해석하기=공유하기
지난 목요일 트레바리에서 이수경님의 <노션을 쓰고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를 들으면서 업무에서 생산성, 나의 전문성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톺아보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았다.
- 매일 보고, 읽고, 생각하고, 일하는 순간을 기록하지 않으면 흘러가버린다는 것.
- 정보와 경험을 조직화해서 구조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 반복을 통해 쌓여가는 나의 자산을 형태화하고, 공유해보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
셀프 브랜드 강의는 아니었는데,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왜" 잘하는지에 대해서 차곡차곡 정리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거창한 브랜드가 아니라 '오늘의 나'가 쌓여 '오늘의 나'가 된다는 싱겁지만 무거운 진리에 도달했다. 업무 히스토리와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나의 고민들을 기록하면서 정리하고, 정리한 내용을 모아서 개인적으로 회고를 해야 나의 매력을 찾을 실마리가 생긴다.
보잘 것 없고, 줏대 없는 것 같은 나의 경력도 일단 내가 가진 경험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보고, 소회를 정리해보고, 오늘의 나와 연결 해보기. 어디까지 내가 할 수 있는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매력적인지 톺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