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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Mar 06. 2020

미술계를 떠난 이유

커리어 체인지 1. 안정성과 성장 가능성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2017년 뉴욕에서 전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일할 때다. 


미술관의 직원으로 고용된 것은 아니었고, 프로듀서로 갤러리와 계약을 맺고 루프탑 커미션으로 불리는 옥상정원에 현대미술 전시 프로젝트의 프로덕션을 담당하는 역할이었다. 나는 작가 스튜디오 <> 미술관 <> 제작사를 조율하면서, 제시간에 작품을 만들어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전시 프로듀싱을 본격적으로 업으로 삼은 지 4년째, 드디어 뉴욕에 입성했으니 이제 나의 커리어는 정점에 올라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었다. 꽃길은 아니었다. 학부시절부터 한 번도 쉬지 않았던 나의 미술계 경력은 가시 투성이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였다. 상처밖에 남지 않은 훈장이지 않았을까... 


미술계를 떠나고, 테크 스타트업에서 인턴부터 다시 시작했다. 


커리어 체인지를 결심하게 된 이유,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근거, 그리고 어떻게 준비해서 산업 분야와 직군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는지 나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 미술 바닥에서 온몸으로 구르며 느낀 점, 경제적 사회적 보상에 대한 미술계 종사자의 솔직한 경험담 

- 모든 프로젝트를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운 스킬에 대한 재정의 

- 커리어 체인지 과정에서 부딪혔던 과제와 내가 취했던 전략들 & 정보 공유 




1. 돈 문제 => 커리어 안정성, 성장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다.  


작가 어시스턴트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던, 시급 5천 원 알바시절을 포함하면 9년 동안 '전시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프로젝트 종료마다 커미션으로 결제하거나 인보이스로 진행되는 날뛰는 프리랜서 월수입과 단기계약직으로 전시기간에만 고용되는 조건으로 오랫동안 버텼다. 불규칙한 수입에 해외를 오가며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니, 마침 해외에 간 김에 일이 끝나고 받는 수당이 입금되어 두둑한 시기엔  카르페디엠으로 살았다. EDM 페스티벌도 좋아했고, 쇼핑도, 유명한 맛집에 가는 것도 좋아했다. 미슐랭도 경험 삼아 가봐야 한다며 호기롭게 가보고. 그다음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한 달에서 세 달 정도 휴식기간을 가졌는데, 신나게 돈을 쓰면서 인생을 즐기다 보면 다시 돈을 벌 일이 생겼다. 


전시기획사를 차리고, 국내외 전시 프로덕션을 1년 정도 진행하면서 빚이 생겼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2~3년이 걸리는 대형 전시를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하면 중간에 정산을 받지 않는 이상 출장비, 생활비, 급하게 결제해야 하는 거래처 대금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신용카드 한도가 2000만 원이었는데 매번 선결제를 해서 찰랑찰랑하게 한도까지 쓰고, 한꺼번에 정산을 받아서 현금 흐름도 엉망이었다. 2월 마지막 날, 1800만 원이 입금되어야 하는데 뉴욕에 있는 담당자가 연락이 안 됐다. 당장 신용카드 대금이 나가야 하는데 따로 모아둔 현금도 없고, 변통할 때도 없으니 빨리 해외 송금이 도착하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떨리고, 잠이 안 오고, 하루 종일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신용카드 연체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다. 


전화가 온다. 그리고 무서운 문자도 많이 온다. '정보가 공유되어 신용정보에 불이익이...'로 시작되는 문자, 메일이 쏟아진다. 거짓말같이 매번 잘 나왔던 한도조회도 안된다. 자격이 안된단다. 한국에서 4대 보험을 받은 적도 없고, 프리랜서이니 가뜩이나 불리한데, 정말 갈 때까지 간 거였다. 3일 뒤, 해외 송금이 입금되었다. 담당자가 휴가를 갔는데, 프라이빗 뱅크에서 입금을 해줘야 하는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를 하지 않아서 중간에 송금이 대기상태로 공중에 떠 있었던 것. 연체된 신용카드 대금을 다 냈지만, 마음이 서늘해졌다. 


구렁텅이로... 가난한 사람이 더 부지런하다. 


만약, 해외 갤러리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면?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나는 어떡하지? 고객들의 요구에 맞추느라 하루 종일 일하는데 왜 허덕이는 기분만 들지? 안정된 직장(공기업)을 다니며 승진을 했다는 친구는 5년 차에, 주식 투자도 시작했다고 하는데 나는 당장 재무담당 직원이 하루만 휴가를 다녀와도, 나의 생활 안정성이 송두리째 바뀌고 현재 내가 감당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는 수익과 무관하게 부채에 끌려다니면서 살고 있다는 게 처참했다. 견적을 내고, 리서치를 하는 단계에서도 리소스를 쓰는데 계약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고스란히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일의 퀄리티에도 영향을 주고, 당장 그 달에 내야 하는 신용카드가 걱정이 되었다. 1인 기업이지만, 법인으로 계약할 때 끌고 들어가야 하는 제조업체 사장님들과의 현금흐름이나 일이 중간에 틀어졌을 때 보상해야 하는 범위나 모든 게 위험도가 크다고 판단했다. 


생활 안정을 확보하고 건전한 재무상태로 만들지 않으면, 일이고 뭐시고 돈걱정 때문에 무너질 것 같았다.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우선 월부금이라도 밀리지 않고 생활비를 꾸준히 벌어야 더 이상 신용카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옵션을 생각해 보았다. 


1.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월급처럼 받으며 일을 진행한다. 

2. 더 일을 많이 한다. 

    2.1 알바를 병행한다. 

    2.2 하는 일의 종류, 보수를 늘려본다. 


단, 하나를 명확하게 했다. "일을 하다가 육체/마음이 아플 정도가 되면 도루묵이다." 생존의 문제가 되자 모든 일에 필사적이 되었다. 나라장터, 국가기관의 기금과 입찰과정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알고 있는 모든 인력과 정보를 동원해서 일을 늘렸다. 하고 있는 일을 더 빨리, 잘하기 위해서 궁리도 해보았다. 전략의 우선순위도 따져볼 새도 없이,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 달렸다. 


6개월 일해도 보수로 100만 원, 1개월에 300만 원 받고 일했는데 유지보수를 2년 동안 해야 한다거나, 공기관에서 월 30만 원으로 보수를 해줄 수 없겠냐고 당당하게 묻는다거나. 돈을 떼인다거나. 아직도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업계 경력으로 쌓은 전문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판을 짜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책임감 있게 매달리고, 적은 예산과 빠듯한 기간 등 열악한 조건에 나의 열정과 시간을 갈아 넣어도 시급이었다. 2억이니, 10억이니 전체 수주량은 커 보였지만 까 보면 세금과 한 달 100만 원 남짓 겨우 남고 그것도 세무사 기장 비로 떼주어야 했다. 


9년간 시급 받기 


이렇게 살 순 없어. 정직원으로 일하면서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는 큐레이터의 업무지시를 받으면서, 불리한 계약조건으로 모든 일을 대신해서 처리하고 기획한 전시를 '만들어 주는' 역할은 전문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2009년에 받았던 대우와 2018년에 받았던 대우가 다르지 않다. 전문성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거듭할 수록 할 수 있는 일의 범위, 권한, 경력, 기획력과 실행력이 올라가며 그만큼 보수와 대우도 달라져야 하지 않는가? 


근데 5000원 (정확히 말하면, 4780원) 시급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일한 시간 x 시급'으로 철저하게 계산을 해서, 전시 설치 직전 1달만 바쁘니 그때는 풀타임으로 하고 그 전에는 일주일에 00시간으로 두자며 단가를 후려치려는 '코디네이터 계산법'은 그대로다. 사장이어도 코디네이터 일을 하니, 무늬만 사장이라 더 불리했다. 근로계약의 보호 없이 유사시 책임소재는 개인이 지며, 기업이익이나 대비 금 00% 계산은 당연히 없고 전시에 필요한 비용에 딱 맞게 계획하여, 코디네이터의 시급을 끼어 맞추려는 공기관 큐레이터의 속내가 그렇다. 그 큐레이터가 그렇게 계산해도 되는, 이런 계산법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전시 예산만 배정해주는 기관이 그렇다. 


설상가상, "혜진 씨 아니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공짜로도 하려는 석사 졸업생들 많아~"


택시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5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맥없이 쳐져있기 전까지. 다들 이렇게 일하는 줄 알고 살았다. 나랑 똑같은 강도로 일하고, 심지어 나보다 더 똑똑하고 재주가 많은 수많은 동료들은 최저시급을 계산한 월급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으니까. 최소한 시급이라도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한 번도 일 안 끊기고 쭉 일해온 내가 대견해서. 


미술계의 구조가 비정상 정이라는 걸 깨닫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일하면서 였다. 출산휴가에서 막 돌아온 프로듀서 J는 직함이 프로듀서였다. 직급도 있었고, 부서도 있고, 월급도 많이 받는 전문직이었다. 그래서 나도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나도 프로듀서가 될 거라고. '전시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프로듀서가 직업이며, 작품의 제작과 전시 진행 및 이에 필요한 모든 부대 프로젝트 (도록 출판, 언론 보도, 오프닝 파티, 작가 매니지먼트, 이벤트 진행...)를 담당하는 사람이니까. 전시 기획 전/후에만 해당되는 큐레이터의 '보조'나 '대기자가 경력이 없을 때 잠시 몸담는 알바'가 아니라 전문성을 가지는 직업이 될 수 있다고. 


연봉 평균 1255만 원 


일단, 한국 미술계는 프로듀서라는 사람을 직업으로 인정해주면 당장 전시가 불가능하다. 일 년에 쏟아지는 미대생들의 열정 페이인 '무료' 자원봉사 또는 시급으로,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에겐 '250원'으로 (전시 출품 대가 하루 250원? 국립현대미술관 "개선하겠다”) 처음에는 학력이 문젠가 싶어서 대학원도 진학했다. 영어와 중국어도 공부했다. 관련 업계의 경력도 쌓았다. 그래도, 여전히, '시급'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예술계 평균 연봉 1255만 원) 2018년, 예술계의 무급인턴과 비정규직 문제가 예술인 복지재단과 기금 관련해서 가시화되면서 종사자들이 예술계 연봉을 익명으로 밝혔는데 더 심각했다. 가장 큰 문제는 12년을 일해도, 비정규직일 가능성이 많고 연봉이 2200만에 머문다. (예술계 연봉) 비정규직을 계속 고용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을 해야 하니, 11개월 20일 정도가 되면 '자진퇴사'하게 한다. 또는 8개월 이하 단기 계약직으로 뽑는다. 


아무리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고,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도 쪼그라드는 산업과 고질적인 근로 문제가 산재해 있는 미술계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해야 했을까? 뭐라도 달라졌을까? 나주에 있는 문체부에 입사했어야 했을까? 처음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 내가 몇 년 동안 버텼는데. 조금만 더 일하면 최고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릴 거야" 만화 같은 생각을 하면서 버텼다. 그래도 한 달에 30만 원을 벌면서 살 순 없었다. 전시 개막일에 맞추려고 작품 제작에 필요한 비용까지 내 신용카드로 긁어가면서. 금니가 빠져서 치과에 가야 하는데, 지역가입자라 건강보험료도 비싸고 신경치료에 크라운까지 비용이 걱정돼서 못 갔다. 뻥뚤린 어금니 자리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시렸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데, 커리어라고 지금 까지 해온 일을 계속하고 있는 내가 걱정이 되었다. 


평생 뭐 해 먹고살지? 


일단 시급으로 일할 거라면, 다른 데서 한번 일해보자. 주변에도 편의점에서 일하거나 경비로 일하면서 작업 생활을 지속하는 비평가 친구들도 있었고. 사람인(인지 잡플래닛인지)에서, 미대 졸업생의 대기업 취직 비율 1순위가 맥도널드, 2위가 스타벅스였다. 나는 시간을 돈으로 바꾸고, 아무리 오래 일해도 월급이 오르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생활은커녕 부채를 절대 갚을 수 없다는 계산을 했다. 


그래서 쇼핑몰을 시작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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