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진킴 Mar 13. 2020

쇼핑몰 하면 돈 많이 버나요?

커리어 체인지 2. 이커머스의 세계로... 더 깊은 빚의 구렁텅이로 

뭐든 해서 굶어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처음부터 쇼핑몰을 하려는 계획은 아니었고, 프로듀서로 계속 일을 하면서 병행할 수 있는 이커머스를 통해서 기본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다. 


아이템을 보는 눈에서 시작 


나는 해외직구 경력이 10년이 넘는다. 중학교 때 연필을 사기 위해, 독일에 편지를 보내고 미국에 전화를 하고 우체국에서 달러를 송금한 경력도 있다... 여드름을 치료하겠다고, 지금은 올리브영에서 2+1으로 파는 바이오더마도 2004년에는 프랑스에서 모델들이 패션쇼에서 쓴다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소개하는 제품이었다. 나는 그걸 구하겠다고 사방팔방에 연락을 해서 어떻게던 구해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여드름이 낫진 않았지만 좋은게 있으면 직접 구해서 쓰는건 포기만 안하면 가능하다는 근성을 배웠다. 


연필, 지우개, 공책, 해리포터 원서 부터 해서 인터넷 쇼핑이 보편화되기 전에, 이베이에서 낙찰 받거나 한국에선 비싸게 팔지만 미국에서 사면 훨씬 더 싸고 할인폭도 큰 아이템을 '득템'하는 재미에 인터넷 쇼핑의 노하우가 차곡차곡 쌓였다. 가장 재미를 본 아이템은 탱고 구두였다. 20살, 서울에 오자마자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우러 홍대에 있는 땅고오나다를 찾아갔다. 중고등학교 시절 <해피투게더>같은 영화를 보면서 서울에 가기만 하면 탱고를 배워보리라...! 벼르고 있었던 나는 춤에 푹 빠져서 살았다. 


개인적인 취미와 좋은 아이템에 대한 집착이 머니타이징으로 이어진건 어쩐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21살, 탱고 구두 판매로 시작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불안했고, 서울에 친한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사는 집에 가는 것보단 화려하게 꾸미고 집에서 춤 연습을 한 다음에 언니오빠들이 많은 밀롱가에서 노는게 재밌었다. 탱고 구두는 2008년-2009년에 '땅고 슈즈 오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오딜 사장님이 직접 춤 동호회를 다니면서 발사이즈도 재고, 맞춤 주문을 받아서 성수동 신발공장에서 직접 만든 '국산'과 아르헨티나 댄서들이 신는 '원조' 브랜드로 크게 갈렸다. 당시 한국에서 사면 12만원-14만원 정도 였고, 서울역 근처 염천교 신발상가에서 사면 7만원대도 찾을 수 있었다. 투박하고 굽이 낮은 국산보단, 25만원짜리 '꼼일뽀' 라는 브랜드가 좋았다. 말로만 듣던 루부탱의 자태가 느껴졌고, 전세계에 몇켤레 만들지도 않고 시즌마다 디자인과 가죽이 한정판으로만 제작되는 이 브랜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독일에 간 이후로, 방학 때마다 유럽에 있는 워크샵이나 섬머스쿨을 수강하러 해외로 갔다. 학교 친구들말고 세계 어디에나 있는 춤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와중에, 구두를 끈질기게 사냥하러 다녔다. 웹사이트에 올라가지 않는 리미티드 컬렉션을 보러 슈즈 딜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아파트에서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구두 상자에서 내거, 그리고 아는 언니들 구두까지 챙겨서 트렁크에 싣고 들어오는 보따리 상을 했다. 그러다가 이탈리아에서 만드는 '마담 피봇'이라는 아름다운 슈즈 브랜드를 알게되서, 국내에 정식 수입자가 생기기 전까지 거래하면서 국내에 제품을 직구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을 했다. 


전화해서 담당자를 찾아내고, 도매가를 체결하고, 세관 문서를 처리하고,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나 새로 생기는 디자이너 슈즈를 발빠르게 찾아다니면서 댄서들을 상대로 구두를 많이 팔았다. 마진은 20~30%로 크진 않았지만, 학생 용돈으로 만질 수 없는 비싼 탱고 구두들을 싼 가격에 구해서 신을 수 있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프라다 전문 유학생 


그러다 중국에 유학을 갔다. 2011년 교환학생으로 베이징에 체류할 때만 해도 중국엔 타오바오가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해서, 같은 반 친구들도 모르는 웹사이트에서 물건을 계속 시켜서 친구들에게 새로운 아이템을 유행시켰다. 특히, 중국애들은 할머니 신발이라고 좋아하지 않는 벨벳 메리제인 플랫이나 쿵푸슈즈를 매치해서 신고 한국에 들여오기도 했고, qq를 통해 슈푸라고 불리는 사입삼촌 네트워크에 들어가서 프라다와 막스마라를 전문으로 취급했다. 


중앙미술학원은 중국의 4대 미술학교 중 하나로, 수도에 있는 연극학원(연기), 영상학원(영화), 복장학원(패션) 등과 함께 베이징 곳곳에 힙한 친구들이 많았다. 다들 기숙사에 살아서 나도 자연스럽게 친구들의 고등학교 친구가 있는 다른 예술 학교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제일 친한 쓰쓰라는 친구가 마침 남자친구와 라이브 카페를 차려서 운영했기 때문에 아지트가 되었다. 나는 한국의 화장품과 스타일난다 같은 쇼핑몰의 옷을 구해다 주고, 친구들은 대사관 근처에 있는 명품 짝퉁 시장에 나를 데려가 주는 식이었다. 자연스럽게 한국 유학생 언니들이 알바로 많이 하는 S급 딜러일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갈 때 마다 가방에 프라다 3개, 루이비통과 샤넬을 챙기고, 제일 비싼건 내가 들고 가는 식이었고 서울에서 국내 택배로 보내주는 운반까지 직접했다. 공안이 언제 뜨는지, 벌금이나 물건을 뺏길 수도 있기 때문에 정보력은 생명이었다. 


직접 물건을 받으러 중국의 큰 도매시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중국에도 탱고를 추는 댄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구하기 어려운 리미티드 컬렉션을 구해다 주는 일이나 해외 댄서의 프라이빗 클라스를 연결시켜주고 통역을 하는 걸로 용돈벌이도 했고. 유명한 드레스 재봉사들과 일하면서 새로운 탱고 스커트나 원피스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직접 원단을 구하고, 그림을 그리고 피팅을 보면서 맞추는 식이었는데 해외 유명 댄서의 영상을 보고 카피해서 파는 식이었다. 치마에 슬릿을 넣거나, 셔링을 잡아서 빈약한 엉덩이 볼륨(?)을 보완해주는 스커트가 대박을 쳤고, 화려하고 팔랑거리는 치마에 코르셋 검정색 탑을 받쳐서 입는 시그니쳐 스타일도 만들었다.  


중국어를 할 줄알게 되면서 시장이 넓어졌다. 대만 뿐만 아니라 싱가폴, 말레이시아 등지의 중국 화교들과도 말이 통하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 대학생이라고 해서 독일 등 해외 댄스 페스티벌이나 워크샵에서 아시아 친구들을 많이 사귀기도 했다. 춤은 보통이었지만, 친화력과 언니들의 유행을 잘 간파하는 안목으로 좋은 아이템을 대신 구해주는 수완이 좋은 동생으로서 팬층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깔롱(?)진다고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과는 척을 지게 되기도 하고... 미술계 일 자체가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시장을 볼 기회가 많으니,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에서 귀한 것들을 '물길어 주는' 낙차를 이용한 발품팔이 짬밥을 계속 먹을 수 있었다. 


전신 바디수트와 레깅스에 빠지다 


왼쪽이.. 접니다.. (지금은 상상도 안되지만) 


2017년 뉴욕에 갈 때 쯤엔 살사에 빠져 있었다. <마이애미 블루스>의 공리 처럼 입고, <더티댄싱2>의 주인공 처럼 이국적인 리듬에 막춤을 추는게 너무 재밌었다. 암울하고 답답한 대학원 생활에 새로운 돌파구를 계속 찾아다녔던 시기이기도 하다. 닉네임은 '킴'이요, 한국인인지 브라질 사람인지 가늠이 안가게 새까맣게 타서 열심히 춤을 배우러 다니던 나는 직업은 미술 프로듀서이지만 일상의 80%는 댄서처럼 살았다. 코어근육이나 턴을 돌려면 체계적인 훈련을 꾸준히 했고, 부족한 춤 실력을 메꾸어줄 장비에 투자하는 것도 아끼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에서 근무가 끝나면 지하철을 타고 푸에르토리코 이주자와 프로 댄서들이 모여있는 할렘으로, 브롱스로, 퀸즈로, 뉴저지로 처음 보는 동네도 겁없이 찾아갔다. 콘템포러리 댄스 씨어터의 워크샵도 들으러 갔고, 뉴욕에서 한참 유행하기 시작한 힐댄스, 트월킹, 아프리카 하우스 춤도 배우러 다녔다. 그리셀 폰세라는 맘보에서 가장 유명한 댄서의 개인 레슨을 듣기 위해서, 그녀의 집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수업을 들었다. 9개월 임신 중이었던 선생님에게 바디 코디네이션부터 배우고 리듬을 공부하고... 


내가 살았던 윌리암스버그 근처의 베드스터이라는 브루클린 지역은 카리비안 커뮤니티가 많았는데, 화려한 스팽글이나 현란한 무늬의 레깅스를 파는 샵들이 있었다. 한참 요가를 하면서 리퀴도라는 브랜드에 빠져서 패턴 레깅스에 빠져있었고, 프로 무용수들이 입는 새로운 스타일의 레오타드가 눈에 뛰였다. 근데, 이 레오타드를 입고 공연하고 수업하는 댄서들이 많아지면서 전세계적인 유행 직전에 내가 이 아이템을 발견한거다. 처음엔 내가 입고 다녔고, 주변의 부탁을 받고 하나씩 더 구해서 주다가, 아예 브랜드를 수입하게 되었고, 내가 원단과 패턴부터 작업해서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서 만들어 미국과 한국에 팔았다. 


한 벌에 15만원에서 24만원 까지 가격대도 비싸고, 공연복에 가까워 프로 댄서들만 입던 레오타드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2018년에는 아시아 전역의 공연단과 소셜 댄서들을 상대로 판매할 수 있었다. 원단 1롤을 새로 짜고, 폴리아미드나 엘라스틴, Lycra 같은 스포츠 원단과 혼용율을 공부해 가면서 점점 욕심이 났다. 옷장사는 재고 때문에 망한다더니... 같은 레깅스 200장을 만들어서 다 팔고 새로운걸 만드는 간격이 크면 클 수록 현금 흐름은 나빠졌다. 제조사에 대금을 낼 때마다 목돈이 떨어지는데, 실제로 얼마나 벌고 있고 이익인지 적자인지 체크도 안하면서 정신없이 돌아갔다. 


1인 쇼핑몰, 정말 어렵다. 


모든 걸 제작하긴 어려웠으니, 동대문에서 도매와 주문제작도 시작했다. 해외에 제조 공장이 있다보니 사고가 터지면 손실이 너무 컸다. 그래서 마진은 작더라도 꾸준히 판매하면서 고객층을 유지할 수 있는 동대문에 들어갔다. 물론... 잘 되진 않았다. 못 팔면 그대로 재고가 되었고 유행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졌다. 


판매를 위해서 배워야하는 것도 많았다. 직접 사진 작가를 섭외해서 화보를 찍고, 포토샵과 영상 편집을 하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고 광고를 하는 것도 1:1로 탈잉에서 배웠다. 처음엔 크몽에서 외주를 줬는데 비용은 크고, 관계를 유지해야할 명문이 없으니 따로 수정을 요청하거나 장기적인 시작에서 유지하긴 어려워서 직접 배워야 겠다고 생각해서였다. 6개월간 거의 주말마다 수업을 듣고, 선생님에게 외주를 맡기며 배우면서 당장 쓸 광고를 태우고 정신없이 매달렸다. 


미술계 프로젝트를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나서 부터, 평소 생활비나 용돈 정도만 벌었던 이커머스를 100%로 전환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들어갔다. 체계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시장이 움직이는 데로 새로운 아이템을 실험하며 돈을 부어가며 시작한 일이니 점점 '버는 돈'은 쪼그라 들고 자취방에는 택배박스와 도매 대봉(엄청나게 큰 봉지)가 제품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현금이 떨어지니 신용카드로 도매 제품을 사고, 3일간 팝업스토어를 해서 판 현금으로 허겁지겁 대금을 겨우 맞추기도 했다.  번아웃이 와서 CS 대처가 조금만 늦춰지거나, 거래처에서 사고가 나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졌다. 한국 고객들이 너무 까다로우니, 해외 시장을 개척해보기로 했다. Shopify와 아마존, 타오바오, 위챗 미니스토어를 고민하다 쇼피파이에 열었다. 비트코인으로 옷을 살 수 있는 플러그인도 달았다. 그 때, 처음으로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쇼피파이는 드롭쉬핑으로 운영했다. 중국의 제조사를 통해 소싱을 하면, 쇼피파이 시스템에서 자동화된 주문을 통해 전세계 어디에 있던 고객에게 무료배송을 해주는 식이었다. 드롭쉬핑은 본질적으로 타게팅과 최적화를 통한 1초 1클릭으로 대량 판매를 하는게 목적이지, 실제로 고객들에게 좋은 제품을 주거나 삶에 변화를 주는 '브랜드'와 라이프 스타일과는 정 반대되는 꾼들의 장사세계였다. 광고 생태계와 온라인 커뮤니티가 움직이는 방식은 이해했지만 쌓여가는 부정적인 댓글을 가짜 리뷰로 바꾸면서 회의감을 느꼈다. 


실제 내 얼굴을 알고, 내가 어떤 옷을 입고다니고 어떤 구두를 신는지 알고 있는 고객들이 직접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불만이 많은 고객을 상대로, 돈은 점점 떨어져가니 '재고 떨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또 팔면 되니까, 라는 식으로 자극적인 아이템과 이벤트를 기획하고 생활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VIP고객에게 끌려다니기도 하고... 


리셋이 필요해. 


우선 쇼핑몰을 하면서 악화된 재정을 정리해야할 필요. 

체계적으로 디지털 마케팅을 배우고, 업계를 이해할 시간. 


이 두가지를 벌기 위해서 취직을 결정했다. 고정 수익이 절실 했다.

근데 4대 보험 한번도 받아 본적 없고, 회사도 안다녀 봤는데 어떤 회사에서 나를 원할 것인가? 

나는 무슨 직군으로 지원을 해야하나? 

29살을 생 신입으로 받아줄까? ..  

매거진의 이전글 미술계를 떠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