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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Apr 10. 2020

내가, 무얼, 더

커리어 체인지6. Where the magic happens 

내가, 무얼, 더 


더 빨라지고 싶어서, 더 달라지고 싶어서, 더 배우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8월 27일, 29살 생일이 지난 늦여름의 월요일, 을지로 위워크로 첫 출근을 했다. 

내가 10년 동안 알고 지내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미술계를 떠나 처음으로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직업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서 설레고 두려웠다. 

안전지대를 떠난 건 처음이었다. 

위워크의 감성적인 공간, 대담한 색으로 페인트칠 되어 있고 명동성당이 보이는 자리가 좋아서 덜 긴장 되었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보상을 받고 싶은지 처음으로 내가 바라고, 면접과 협상을 통해 얻어낸 기회였다. 


월세를 내기 어려웠고, 대출도 필요했고, 아직 치과 치료도 못받았지만 나의 방향을 찾아, 나만의 길을 내고 있는 중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내가 직접 책임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분명 있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이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응할 건지 미술계를 떠나 새로운 모험을 해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경력직 수습기간으로 면접에서 이야기했지만, 몇일 뒤에 인사팀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인턴이라고 적혀있었다. 3개월 이후 전환 심사를 보게 된다고 한다. 사전에 협의한 내용과 달랐지만 질문을 하면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칠 것 같아서 그대로 인턴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스타트업은 대기업처럼 조직도가 복잡하거나, 한 팀에 사람이 많지 않다. 그만큼 그 일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인재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스타트업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다. 


"할 줄 알면, 다 니 일이야" 



실제로 온갖 일을 다 했다. 내가 속한 커뮤니케이션 부서의 업무영역이 모호하고, 부서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잦은 변경이 있어서 기획-실행이 무한 반복되어 계속해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돌아다니면서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초기 투자에서 시리즈 A를 유치하기 직전까지, 1년에 직원이 80명이 들어오던 시기에 들어갔으니 폭발적으로 몸집을 불리는 회사에서 다양한 직무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 식의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조직내 이해관계에 따라 생기기게 바쁘게 '쳐내면서' 업무를 했다. 


신입이라고 별도 교육일정이 있거나, 보조 업무를 맞기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바로 전력질주를 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장업무에 필요한 도구나 아이디어를 리서치하고 배워서 바로 적용했다. 1년도 안돼 구글 아날리틱스, 영어로 블로그 콘텐츠 제작, 콘퍼런스나 오프라인 이벤트 기획과 홍보, 유튜브 라이브나 SNS 콘텐츠 기획과 제작, 해외 마케팅 에이전시와 업무, 바이럴 생태계를 골고루 겪어 보았으니 매일이 전쟁같았다. 3년 동안 하나씩 차근히 해서 늘려가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배워서 적용해보고 새로운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벌리니 몸이 세개라도 모자랐다.  


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던 팀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내기 시작했던 순간부터는 일이 넝쿨째 떨어졌다. 월급은 140만원 정도 였고, 3개월 후 연봉제로 정규직 계약을 했다. 그래도 주말에 쉴수 있고, 유급 휴가인 월차를 한달에 한번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복지포인트로 책도 사보고 회식도 다니고 출입증 목걸이도 있는 내가 대견했다. 블록체인은 사기꾼이라며 걱정하던 부모님도 월급 따박따박 들어오고, 멀쩡한 건물에 사무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번듯한 정장입고 행사 다니는 큰 딸을 보면서 '드디어 네가 사람이 됐다며' 좋아 하셨다.


단순히 역할 과부하 뿐만 아니라, 노동 밀도task density 도 높았다. 반복 업무도 있었지만, 이슈가 생기거나 사업 전략상 필요에 의해 단발성으로 진행해야 하는 이벤트, 콘텐츠, 홍보 지원 업무가 계속해서 중첩이 되었다. 신사업 론칭 TF팀에 들어가서 각기 다른 부서의 팀원과 일하면서 깡다구만 늘었다. 개발자, 기획자, 전략팀 직원들과 이야기하려면 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업무 맥락도 이해했어야 했고, 나의 몫을 하기 위해서 리서치를 하고 제안의 형태로 만들어 내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야 했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과 사용자 커뮤니티의 생리를 이해하는 것부터, 개발 회사에서 다양한 직군의 사람과 이해하기 위해 익혀야하는 기본적인 IT 지식과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스타트업에 대한 공부도 필요했다. 


우리 사회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다. 무지나 실수도 약점이 될 수 있다. 한번 잘못 끼운 단추에 치러야 하는 대가는 매 회의마다, 매 보고마다 혹독했다. 동료를 설득하고, 협업을 하기 위해서 나는 전문성이라는 방패가 필요했다. 지금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기도 벅찼는데, 한 발자국 더 앞서가려고 하니 몸과 마음이 계속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고,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주말에도 불타오를 수 있게 하고 회사를 다니면서 집중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만큼 부딪히는 사람도 많았고,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다. 





10개월 동안, 나는 나의 안전지대를 떠나 다양한 문제와 맞닥뜨렸다. 몇가지 문제는 성장의 기회로 바꿀 수 있었고, 아직 질문으로 남아있는 문제도 있다. 개인적 세계를 넓히고,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발굴 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견딜수 없는 상황들이나 동의할 수 없는 결정도 만났다. 많은 사람들은 회사에 대해 고민하면 "다 똑같아" 또는 "그만둬" 또는 "다른 회사로 옮겨" 라는 결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회사에 적응하고 업무에 익숙해질 수록,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의 발전과 성장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를 객관적으로 질문하려고 긴장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정말 미술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 Yes! 

연봉도 작고, 회사에서 내 자리는 소박하기 그지 없어서 서럽고 힘든 순간도 있지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나를 발견해나가는 재미에 중독되며 유연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세상에서 나의 쓸모를 찾으려 애썼던 시간은 어떻게 보면, 남이 써놓은 대본에 따라 움직이기 바빴던 과거의 나를 책임지는 일이었다. 앞으로 올 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을 실현하려 움직이려 했다. 미술계의 구조와 열악한 노동환경의 무력한 희생자로 나를 격하시키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 불안정하고 성장할 수 없고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회사에 다니면서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회사 중심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내가 회사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미술을 전공하고 새로운 기술과 산업의 발전, 스타트업과 프로덕트에 대한 호기심을 발전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새벽과 주말까지 바쳐가면서 열심히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렇게 치열하게 일하면서 나는 무엇을 얻거나 쌓고 있는지, 나의 전문성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따져 보니 점점 더 미궁으로 빠졌다. 


내가, 무얼,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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