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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Oct 08. 2024

실패한 화대종주

 WBC 시즌5 <산에 가자!> 시리즈 마지막 번개 


저마다 산에 가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살려고 간다. 너무 힘들 때 힘을 얻기 위해서 간다. 근데 요즘은 산이라는 유일한 치료제도 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서 괴롭다. 실패와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쓰라리다. 


지난 개천절 반달이 프렌즈 멤버들과 와일드우먼 멤버들 (어쨌든 WBC 인연으로 만난 산친구들)과 지리산을 다녀왔다. 몇 달 전부터 꼭 가고자 했던 '화대종주'를 도전하게 된 우리...! 1박 2일로 계획하고 세석 대피소를 예약했다. 5명은 당일 계획했던 대로 세석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화개재에서 뱀사골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결정, 12시간 동안 30km를 걷고 마무리했다. 화대종주는 실패했다. 



초가을 구례의 공기, 습도, 온도 그리고 나의 무게  


연차를 내고 일찌감치 구례에 도착해서 친구 아라와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우리밀로 빵을 만드는 <목월빵집>에 들려서 맛있는 간식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지리산 화엄사 입구 아웃도어 편집숍 <올모스트데어>에서 빈티지 가을-겨울 등산 의류와 장비도 고르고, 입구 바로 앞 숙소에서 모여서 준비를 했다. 구례는 살짝 추웠지만 날씨가 좋았고,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터를 잡고 사는 젊은 얼굴들과 내 친구의 삶을 스쳐지나가며 잠시 나의 구례 버전을 떠올리기도 했다. 


나는 엔간히 지쳐있었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어디로든 훌쩍 떠나가고 싶을만큼. 그 마음이 크면 클 수록 '해야만 하는' 일과 약속들이 떠올라서 부푼 마음이 터져버리고 마는 사이클이 반복되서 이제 실망의 낙폭도 느껴지지 않을만큼 가라 앉아 있었다. 좋다는 명산을 다 가봐도 마음에 감흥이 없으니 괴롭다. 


산은 가기 전에 계획하고, 멤버를 모집하고, 준비하는 데서 산행이 시작되는 데 나는 어디서 부터 실패한지 모르겠다. 출발 전날에 짐을 싸면서 오버패킹하고, 빵집에서 무거운 잼과 빵을 여러개를 사고, 모자라서 편의점에서 또 간식을 사고... 시작도 하기 전에 가방은 무겁고, 누적된 피로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가방은 가방대로 무거웠지만, 마음이 더 무겁지 않았을까... 이를 이겨낼 내면의 힘은 약해질 때로 약해지지 않았을까... 그냥 올 한해 내내 루틴 없이 흘러가는 데로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었던 것 같고, 체력이 조금씩 소실되다가 지금은 풍화되어 버린느낌이다. 황량하다. 씁쓸하다. 


너무 힘들어서 손하나 까딱 하기 힘든데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구례로, 구례에서 화엄사 입구로 이동하면서 나는 무엇을 바랬던 걸까. 산이 정말 모든 것의 답일까. 혼자서 하기 어렵다면 친구들과 함께 하면 된다는 레시피가 맞는 걸까. 하기 싫은 걸 꾸역꾸역 하느라 이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버린 것 같아 괴롭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다른 것들은 내려 놓을 수 있다. 우선순위가 생기고, 삶이 정돈된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하려고 에너지를 분산시키면 여러 가치가 내면에서 충돌하게 될 수밖에 없다. 나 처럼 부산, 서울, 산을 왔다갔다 하면 누구라도 지칠거다. 그냥 내가 원하는 곳에 계속 있고 싶다. 묵직하게 한 곳에만. 어디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이것 저것 챙기다 보면 가방은 보부상이 된다. 이동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심플하게 살고, 가볍게 살고, 더 멀리 깊게 들어가고 싶다. 


화엄사에서 출발은 했지만 대원사 까지 가지 못한 것, 나의 무게와 체력. 에너지를 어디에 분배하고 운용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1인분의 몫과 한계 


9월 말 부터 나는 한국 등산학교에 다니고 있다. 74년 개교하여 올 해로 50년이 된 마운티니어링 교육 기관으로 산악 정신, 기술, 훈련 그리고 이를 통과한 산악인들과의 네트워크까지 얻을 수 있는 학교다. 나는 드디어 호그와트에 입학하게 된 심정으로 학교에 갔다. <산으로 가는 길>이라는 첫번째 수업을 듣고, 아득한 선배들인 강사님들과 제각기 다른 동기들과 함께 어우러져 산을 다시 배우고 있다. 


산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학교도 들어가고, 국립공원공단에서 어떤 유의미한 활동을 해보고 싶어서 서포터즈에 도전한 것도 내가 올해 초 시작한 <산에가자!> 번개 시리즈 때문이다. 산이 좋아서, '산'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힘이 나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등산을 통해서 나는 진정으로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삶을 즐기게 해주는 방법을 찾으니,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좋은 날씨가 되면 산이 그리워져서 뛰어가곤 했다.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산에 갈 수 있으니까. 그러면 다시 돌아올 힘도 생기곤 했다. 


같이 산에 가는 친구들이 WBC 우먼스베이스캠프를 통해 생기면서 책임감도 생겼다. 산에 대한 조사도 하고, 여러가지 변수를 고려하고, 비상약품을 챙기고, 친구들에게 미리 OT를 하고 정보를 전달한다. 내가 예상치 못한 이슈가 터졌을 때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나보다 더 산을 잘 아는 사람들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를 선택했다. 제로웨이스트 등산과 알맹상점 방문 이 후에 더 적극적으로 이를 알리기 위해서 서포터즈도 시작했다. 


화룡점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화대종주 직전. 나는 지쳐있었다.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배워나가는 암벽등반 훈련은 나를 완전히 소진시켰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직장과 대학원과 사이드프로젝트를 오가며 나는 힘만 빼고 있었다.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뺑뺑 돌고 있는 모습이 <인사이드아웃2>에서 과부하가 와서 손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불안이 그 자체였다. 힘든데 어떠한 조치도 못 취하고 계속 가동하면서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있는 상태. 회사도 그만두고 싶고, 부모님에 대한, 부산살이에 대한 무의미한 인정투쟁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 


그만두고 싶다는 욕망과 계속 싸우면서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끝까지 목표를 완수하는 것이 '지구력'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 존버해서 지구력을 키우는 걸까, 쌩 힘을 낭비하고 있는 걸까. 


나는 등산 번개에서 주최자로서 하는 역할이 많다. 항상 비상약품을 챙겨다니고, 여분의 간식을 챙기고, 친구들의 컨디션을 살핀다. 미리 코스 숙지를 하고, 현재 어떤 상태인지 진단 할 수 있도록 평가지표를 미리 기억해두고 계속해서 계획을 수정하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이번 화대종주에서는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친구들을 믿는 것도 있었지만, 제대로 역할분담이 된 것도 아닌데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둔 내가 무책임하게 행동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많이 의지했고, 정말 고마웠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게 의식 없는 사람을 옮기는 일이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상태 아니었을까. 몸과 마음이 한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은 1인분 몫을 못한다. 체력이 힘이 부치거나, 장비가 없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에너지를 보태지 못하고 구멍이 된다. 비는 오고, 춥고, 체력은 떨어지고,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지리산. 그렇게 좋아하는 지리산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루트였는데 완전히 망쳐버렸다. 



행집욕버 

:행복에 집중하고, 욕심을 버리자 


누구나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산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걱정들, 고민들, 겉으로 반짝반짝 빛나보여도 드러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암흑. 지리산은 과거에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지는'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산을 걷고, 내려오는 길에 비가 잠시 개였을 때 우리는 밤잼을 발라서 밀빵을 먹었다. 가영이가 박수를 치면서 행집욕버를 외쳤다. 행복에 집중하고, 욕심을 버리자. 각자의 욕심이 무엇이었든, 잠시 계곡에 앉아서 쉬면서 행복을 느꼈다. 


나는 구례에 도착해서 아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마지막에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라는 책 이야기를 했다. 요즘 여러 친구들이 하나둘 다시 읽고 있으며, 이 책을 통해 평화를 찾았다고.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인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와 ‘나는 누구인지’ 깨닫고, 진정한 ‘삶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을 배우는 책이다. 자신의 행복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지리산에서 99% 정도는 의식이 껌껌한채로 괴롭기만 했지만, 1%는 깨어있었다. 


가영이네 할머니가 키운 엄청 맛있는 햇대추를 먹었을때. 저 멀리 남해가 보였을 때. 오밀조밀 보이던 보라색 야생화. 솔직하고 귀여운 친구들과의 대화. 아주 잠깐이지만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을 기억하면 내가 잊고 있었던 삶의 기쁨과 연결되는 것 같다. 아, 다시 살만하다. 나는 집중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 꼭 다시 가자! 

누구에게나 암흑이 있다. 각자 이겨내는 방향이 다를 뿐. 

행복만 한 사람은 없겠지. 다만 행복에 집중하려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ssuk_essay_toon <빛의 꺼풀> 



킴킴 추천

구례 카페 타파 커피 

https://www.instagram.com/tappa_coffee/

인테리어가 굉장히 귀엽고 감각적이다. 커피도 맛있다. 


구례 성지 <올모스트데어> 

https://www.instagram.com/a.m.t.here/

엄청 멋진 하이커 아라가 운영하는 편집숍. 셀렉션이 다양하고 귀여운 아웃도어 빈티지가 많다... 보물창고... 

서울로 택배도 보내준다. PCT나 장거리 하이킹에 관심있다면 꼭 주인장에게 물어볼 것!


구례 우리밀빵 베이커리 <목월빵집> 

https://naver.me/5VeAeMgh

구례는 토종 밀 되살리기 본부(!)이다. 밤잼도 맛있었고, 커피도 맛있었다. 정자도 있고 넓어서 좋다. 인기가 많아서 금방 빵이 동난다. 


구례 찻집 <소식다료>

https://naver.me/5EaUVOLC

너무나 가보고 싶었지만.. 수요일이 쉬는날이라 못갔다. 여러분. 구례 대부분 좋은 가게는 수요일에 쉽니다... 기억하세요. 


에크하르트 톨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고에 바탕을 둔 삶’과 그러한 삶들이 모인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그 에고가 모든 인간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실체를 보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을 알려주며, 그리고 그것이 인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일화와 철학적 내용을 통해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인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나와 ‘나는 누구인지’를 깨닫고 진정한 삶으로 다시 떠오르는 길을 제시한다.


'자기라고 믿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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