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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Jan 22. 2020

2019년 결산



'때로는 아름답고 어쩔 땐 참기 힘들 만큼 괴로울 때도 있다. 괴롭다고 도망치지 않고 즐겁다고 안주하지 않는 가운데 오늘이 쌓여간다.' 

김보라 <벌새>감독, 씨네21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미술이론 석사과정에서 전공 서적을 읽었던 게 아마도 마지막 독서다. 2013년. 그 이후로 전시 기획과 프로덕션 일정으로 마드리드, 베니스, 베를린, 파리, 뉴욕, 홍콩, 베이징, 상하이 등 서울과 오가며 정신없이 살았다. 시차에 따라서 하루종일 여러 팀과 연락을 주고 받고, 현장에서 제작과정을 지켜보고, 매일 일에 취해서 살았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팀, 새로운 프로젝트로 매 분기, 매 달 멀티태스킹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정말 끝내주게 재밌었다. 그만큼 나를 계속 외부로 발산하면서, 쓰면서, 뛰어다니면서 에너지를 뿌리고 다니던 시기였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혼자 만의 시간을 가지는 시간이 없어서 내가 점점 투명해지는 것도 모르고. 교통사고로 입원하고 대상포진이 걸리고 여행을 못할 정도로 몸이 상하고 나서야 나는 현실계로 돌아왔고, 멈췄다.  


그리고 책을 다시 찾았다. 테크와 스타트업 시장에 호기심이 생겼었고, 궁금증은 곧 '직접 내가 직접 해보고 싶다!'로 옮겨갔다. <린스타트업> 시리즈나 <플랫폼 레볼루션>, <진화된 마케팅, 그로스 해킹>과 같은 책도 이 시기에 접했다. 패스트 캠퍼스에서 <웹 기획자 실무 CAMP>, <마케터를 위한 데이터 CAMP>, <디지털 마케팅> 코스를 들으면서 스타트업에 직장을 구하려 여러 행사를 다녔다.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로 취직을 한 뒤에는 회사의 사업모델, 시장, 홍보 업무, 채널과 커뮤니티를 이해하기 위해서 실무서적을 많이 읽었다. 처음 일해보는 한국 회사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서 다양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이나 심리학 서적을 닥치는데로 찾아 읽었다. 복지포인트로 한달에 10만원, 그리고 월급에서 10만원을 합쳐서 매달 20만원치 책을 사서 집에 가면 책만 읽었다. 주말에는 돌아오는 회의에서 기획자, 개발자, 경영진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필요한 백업 데이터를 찾고, 논리적 구조를 단단히 하기 위한 사례 위주로 리서치를 했다.  


큐레이터 출신이라, 미술 전공자라서, 테크 스타트업에서 일해본 적 없으니까 마케터로서의 경력은 증명되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 불안감이 동력이 되어서 성장은 많이 했지만, 아슬아슬했다. 


심리학 책이나 퇴사하고 행복 찾았다는 여러 직장인 에세이도 명쾌하게 와닿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여러 직장인 모임도 나가보고, 컨퍼런스나 세미나도 열심히 들었다. 유튜브도 열심히 보고, 팟캐스트도 듣고, SNS도 열심히 하면서. 우연히 독서모임에서 소설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대도시의 사랑법> 같은 젊은 작가들의 책에서 마음이 따듯해졌다. <글쓰기의 최전선>,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 <Writing without teachers>, <논픽션 글쓰기> 같은 '글쓰기' 책을 읽으면서 심지가 단단해졌다. 100일 글쓰기에도 도전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을 썼다. 100일 동안 글을 쓰기위해서 더 많이 읽어야 했고, 세곳의 독서모임에 나가기 위해 독후감 숙제를 하면서 읽은 책을 소화하는 법도 체득해 나갔다. 


2019년 말, 이사를 가고 나서 침실에는 책만 나두고 핸드폰을 들고 들어가지 않는다. 집에서 책읽는게 가장 재밌었던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2020년에는 외부 활동을 줄이고 '자발적 지적 유배'를 떠날까 한다. 관심 있는 주제를 관통할 때까지 글도 읽고, 써보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2018년 부터 일했던 스타트업에서 한/영으로 기업 블로그와 SNS 채널 관리를 했다. 8천명 정도 규모의 페이스북 부터 18만명 팔로우가 있는 트위터까지, 일주일에 2편 이상 일년이 안되는 기간 동안 145개의 오리지널 컨텐츠를 만들었다. 서울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팀원들과 에이전시에서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언어권역별로 나누어 한글, 영어, 중국어로 현지화해서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 까지 숨가쁜 나날이었고, 원어민 타겟을 대상으로 한 업무다 보니 영어가 정말 중요해졌다. 세련되게 전략적인 표현까지 이끌어 내기 위해서 전문 에이전시와 원어민 동료들과 끊임없이 토론했고, 커뮤니티와 고객 인터뷰를 크로스로 진행하면서 피드백을 계속 체크해서 수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실무자인 나의 영어 실력이 정말 중요했다. 레이아웃을 잡고 메세지를 만드는 과정은 직접해야하고, 여러 언어로 현지화 되는 과정에서 지역별 전략에 톤앤매너가 맞는지 체크 하려면 기본 이상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내가 보여줘야했다. 


일하는 과정에서 피드백을 정리해서 Glossary를 정리하는 것부터, 영작문 수업을 듣고 개인 교정교열자를 프리랜서 선생님으로 모시고 다듬는 과정을 함께 진행했다. 항상 경쟁사와 모니터링하는 잘하는 회사의 메세징, 채널별 전략과 컨텐츠를 따라가면서 메모를 생활화 하기도 했다. 에이전시에 계시는 전문가 분들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배우기도 하고. 일년 동안 나는 원어민이 아니라는 컴플렉스와, 결국 한국에 HQ가 있는 회사의 글로벌 사업 개발과 마케팅 전략에 한국인 커뮤니케이션 매니저가 해줄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증명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처음에는 두서없이 무조건 많이하고, 무조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따라하자에서 시작했다면, 2019년 말에는 영어 공부 로드맵을 그려보았다. 예를 들면 한국 중-고등학생도 전문지식의 여부에 따라서 충분히 실용적이거나 기술적인 내용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 생산해내고 글을 쓰려면 충분한 훈련과 피드백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영어 공부는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와 제작해야 하는 컨텐츠에 따라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가다듬어야 하는 스킬이라는 깨닫음을 얻었다. 나의 생각과 삶을 영어로 말하고, 쓰는 능력은 다른 정서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고 일기와 수필을 쓰면서 늘여야 한다는 것도. 전문적 영역의 글쓰기와 개인적인 글쓰기 영역에서 영어 공부의 목적을 다시 정리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매일 단어 공부를 하고, 경쟁사 & 시장의 해외 뉴스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나만의 표현 사전 만들기를 한다. 아침에 30분 일찍와서 카피라이팅에 대한 영어 원서를 읽는다. 번역서라면 대부분 원서를 구해서 저녁에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문단은 통째로 필사를 한다. 주말엔 필사한 내용이나 메모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 주변에 보여주면서 피드백을 받고 퇴고를 하는데, 작은 영어 블로그를 운영해보고 있다. 앞으로는 업무 관련된 내용을 영어로 써서 공개 블로그를 해 볼 생각이 있다. 2019년 여름 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한영 번역 스터디에서 번역을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르헤스의 소설, 감정에 대한 표현 사전, 한국의 단편 소설, 테드 창의 단편 소설을 골라서 진행 했고, 2020년 부터 스티븐 핑커의 <The Sense of Style>을 같이 공부하고 있다. 


비즈니스 이메일 쓰기 이상으로 영어 글쓰기에 고민이 있다면, 내가 운영하고 있는 영어 글쓰기 모임에 들어오면 좋겠다. 완전 처음이라면 <간결하고 힘찬 영어 쓰기 시리즈 3권>, 수사학에 관심이 있다면 <Rhetorical Grammar>, <Style>을 추천한다. 영어 글쓰기 강의와 공부법은 다음에 정리해서 공유해보고 싶다.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휴가로 다녀온 보라카이 

포기하면 진다는 생각에 이 악물고 버틴 것 같다. 이제 나는 포기할 수 있는 30대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안되는 건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물리적으로 내가 가진 에너지 총량 안에서 활동하기. 크게는 건강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고, 커리어나 삶을 꾸려나가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 것. 아둥바둥, 허둥지둥, '말달리자' 하지 않는 삶의 매력을 깨닫게 되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그려보는 시간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삼십대 초반에 알게 되서 다행이다. 스스로 생각해보고 나의 상태와 목표를 점검해볼 시간을 안주는 한국 사회의 속도에서 한발 물러 나야겠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싫은 사람, 동의할 수 없는 일은 거절하고 피하는 법을 배웠다. 외부의 시선과 강압, 성과 압박이 아니라 스스로 어디에서 동기부여를 받고 어떤 일을 즐겁게 하며, 잘 해내는지 관찰하는데 더 관심을 두었다. '난 이런 사람이야' 라는 정의를 조금 열어 두었다. 그러니 '넌 이런 이런 사람인데, 왜 ~' 로 시작되는 말에 고통받는 것도 조금 줄어든 것 같다. 부모님, 직장 동료, 친구들, 사회생활 하다가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게 편해졌다. 고정된 자아상은 무너지고 흔들리기 쉬운 것 같다. 조금 말랑말랑한, 따듯한 상태로 2020년을 보내고 싶다. 


2019년 한 해 동안 신용카드 없애기를 했다. <미스페니의 머니다이어리> 저자인 미스페니 선생님의 푸른살림 재무컨설팅을 들으면서, 길게 경제활동을 보는 안목과 소비습관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내가 먹고, 사고, 돌아다니고, 기분이 좋고 나쁘고 슬프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모두 투명하게 드러나는 나의 삶의 재무재표를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닫았다. 나는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구나. 


새로운 운동인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몸을 분할해서 기능적으로 되살리고, 중심부터 재정렬해나가며 강하게 만들어나가는 생활운동이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하고 싶다. 다이어트가 아니라 충분한 수면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가볍고 건강한 식사로 중심이 옮겨갔다. 


자연스럽고, 나스러운 일이 좋다. 삶에 관대해지고 싶은 맘으로 2019년을 보냈다. 





새로 인스타 시작했어요. @realhyeji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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