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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Jan 29. 2020

벌새를 보고

집에서 혼자 미친듯이 춤을 춰본적 있다면 

아직 <벌새> 안보신 분은 꼭 보세요...! 눈물 한바가지 쏟았는데, 슬프지도 않고, 질척거리지도 않고, 가슴이 아프지도 않고 뭔가 참 개운해요. 불안한데 편안하고, 재밌는데 웃기지 않은 그런 영화에요. 



중학교 때 였나. 그 뒤에도 자주. 일년 전 까지만 해도 종종. 참을 수 없어서 집에 음악을 틀어놓고 발을 구르고, 막춤을 췄다. 기쁨이었는지 분노였는지 그 경계는 희미하다. <벌새>를 보면서 그맘 때 내가 문득 생각이 났다. 


무슨 심정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 성격 이상한 애 아니라고' 외치는 은희를 보면서, 창틀에 걸터 앉아서 소리치던 순간이 떠올라서 울컥했다. 여중생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이상하게 조마조마 하다. 그 나이에는 어떤일 이든 일어날 수 있고, 그 여파가 어디까지 오는지 알 수없는 무던함과 예민함이 공존하는 시기니까. 남자친구와 침대에 손잡고 누워있는 장면에서, 엄마와 아빠가 싸울때도, 오빠한테 맞아서 멍이든 친구 얼굴을 보며,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엄마가 나오지 않는 대문 앞에서 느끼는 조마조마함이 간발의 차로 서스펜스를 피해갔다. 


더 이상 여중생이 아니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은희를 일기장에 간직하고 있다가 문득 그때 했던 고민이 어느 지점에서 생겨서 어른의 삶에 희석이 되었는지 거듭 들여다 보던 사람이 만든 영화다. 그래서 여중생이 아닌 사람이 무상으로 여중생을 싱그러운 과일이니, 부드러운 꽃이니 치환하지 않았다. 우리 안의 모든 은희의 마음에 작용하는 방식은 신비롭다. 

김보라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중요한 건 단정하지 않고 삶의 복잡다단한 면을 투명하게 담아내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우연히 영화 <벌새>가 5만 관객을 넘어섰던 평일 저녁, 강남역 메가박스 근처에 서성이다 전혀 사전 정보 없이 덜컥 은희를 만났다. 


매일 나도 모르게 내가 자라다 보니 계속 부딪혀 가면서, 세계와 나 사이의 '감각'을 알아나간다는 의미에서 이야기가 웅장했다. 만화책 읽고, 떡볶이를 사먹고, 친구랑 공원을 열바퀴도 돌며 하염없이 이야기를 하고, 다이어리 꾸미기를 했던 별 것없는 나날들 사이에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생겨 있었다. 은희를 보면서 어린 시절 나와 공명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기분이라고 이야기할 줄 몰라서 '그냥 그 땐 다 그런거야'라는 어른들이나, '분초단위로 공부해서 서울대가야 인생 핀다는' 선생님이 정의하는 덩어리들만 주억거렸던게 아니었다. 


몇년 도인지 이야기할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90년생이기도 하고 서울에 살지도 않았으니 잘 몰랐던 성수대교 붕괴로 큰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렇지, 그런 큰 사고가 났었는데. 온 학교가 술렁이도록 밀접한 재앙은 직접적인 상실이 없더라도 한 개인에게 남기는 충격과 트라우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끊긴 다리를 나는 무사히 건넜다고 생각하더라도, 같이 온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구멍으로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은희가 가지고 있던 새로운 바람, 영지선생님을 향한 애정과 믿음이 깨지는 것이 가슴아팠다. 영화 한 조각조각이 다 유기적으로 이어져있었고, 나의 어린시절과 현재가 머리속에서 몇번이나 떠올랐다가 켜켜이 쌓이다가 마지막 사건인 영지선생님의 죽음을 듣는 순간 터져나왔다. 언젠가 제 삶도 빛날까요, 선생님? 이라고 묻는 은희의 눈망울과 오빠나 집안에서 나름의 힘을 되찾아가는 순간들이, 내가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해주는 것 같았다. 


별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는데, 사소한 순간에 눈물이 났다. 은희가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다 잡혔을 때, 경찰에 차라리 신고하라는 아버지의 반응에 마뜩찮게 보내주는 사장아저씨. 식구들은 다 밥먹는데 혼자 집밖에서 손들고 서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아려왔다. 벌이란 신기하다. 보는 사람도 없고, 나만 빼고 평소처럼 밥도 먹고 할일 하는 동안, '가만히 벌을 서야하는' 여중생의 자리에 나도 있어보아서 였을까? 아니면, 오빠에게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혼을 내고 제대로 알아보기는 커녕, '싸우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엄마의 발언때문일까. 애초에 내가 오빠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있고, 내가 무얼 잘 못해서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감독의 말 중에 '심리학 용어 중에 '미해결 과제(unfinished business)'라는 말이 있다. 내겐 중학생 때의 일들이 미해결 과제처럼 남아 있다고 느꼈다. 그 챕터와 건강하게 안녕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라는 답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가족 뿐만 아니라, 친구, 선생님, 방방이, 방과후 학원, 복도식 아파트, 상가에 있는 계단, 교복, 재개발 현수막... 자극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 예를 들면 성수대교 붕괴나 김일성 주석 사망사건으로 술렁인 한국의 어떤 모습들, 어느 한군데가 영원히 부서져서 계속 바람이 드는 그런 구멍을 애써 매꾸지 않고, 덤덤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의연했다. '우울할 땐 손을 펴서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던' 영지 선생님도, 선생님이 불렀던 강성 운동권 노래나 서울대 중퇴, 우울 증세 라던가, 그녀의 삶을 '충무로식' 리얼리즘으로 충분히 그려질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어렸을 때 풀지 못했던 한을 오빠는 서울대에 못가고 은희는 서울대에 가서 유명한 만화가가 되어, 성수대교 사건을 치유한다 던가 가짜 승리 스토리로 서사를 이어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벌새는 하염없이 투명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스락거리고 총천연색으로 움직이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투명한 눈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오랫동안 응시하는 은희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항상 엄마를 향해, 남자친구를 향해, 나를 좋아한다는 후배를 향해, 나의 최고 친한 친구를 향해,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향해 움직이고 발산하던 에너지가 어떤 계기로 인해, 은희 안에 웅크리고 앉아 갈무리가 된 느낌이다. 삶에서 사랑은 신비하다. 살아가게하는 힘도 주고, 일상도 지탱해주지만,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어긋나는 방향에 하염없이 불안하게도 만든다. 이 양가적인 삶의 역동성을 소녀의 삶에서 다채롭고, 무게감있으면서 편안하게 다룬 영화는 처음이다. '때로는 아름답고 어쩔 땐 참기 힘들 만큼 괴로울 때도 있다. 괴롭다고 도망치지 않고 즐겁다고 안주하지 않는 가운데 오늘이 쌓여간다'. 


벌새가 끝나고 자리를 뜰수없었다. 

흐느끼는 목소리도 어디선가 계속 늘어났다. 

공동의 트라우마와 개인적 역사가 교차하는, 지극히 사적이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였다. 내면에서, 가족안에서, 사회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내가 맞설수없는 어떤 흐름들 사이에 조약돌 처럼 작고 단단한, 엄청나게 빠르게 날갯짓을 하는 벌새. 은희의 이야기. 


잔잔한 파문이 인다. 

2019년 나에게 최고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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