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의 내면 이야기
타인의 불행을 습관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어떤 변화들이 생길까.
소아정신과에서 임상심리사로 근무하다 보면, 심리검사를 한 뒤 부모에게 그들의 자녀가 지적 장애나 자폐성 장애에 해당한다는 소견을 들려줘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은 일종의 '장애 선고'에 해당되는 것이어서 듣는 부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 너무나 슬픈 이야기이다.
초보 임상심리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중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떤 tone으로 말해줘야 하는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근심 어리고 같이 고민해주는 그런 목소리여야 할까, 아니면 드라마 속 의사들의 모습이 흔히 그러하듯 조금은 냉담하고 담담하게 말해주어야 할까.
결론적으로는 말해주는 사람은 감정적일 필요 없고, 담담하고 차분하게 말해주는 것이 맞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진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얼마나 슬퍼할지 모두 듣는 사람의 몫이었다. 말해주는 사람은 무엇보다 불필요한 불안을 자극시키지도, 무턱대고 안심시키지도 않는 객관적이고 필수적인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 중요했다. 감정적인 위로나 공감은 다른 곳에 가서도 들을 수 있지만, 아이의 정확한 특징과 필요한 조치는 지금 나에게 듣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담하고 차분한 임상심리사로 몇 년을 근무하던 어느 날, 나는 문득 나의 목소리를 되돌아보았다. 당신의 아이가 장애가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매일같이 무척이나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 목소리가 담담함을 넘어 무덤덤함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하고 혐오스러운 감정마저 지나갔다. 그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해야 하는 이 직업이 못쓸 일인지, 아니면 직업이 되다 보니 무덤덤해지기까지 하는 내가 부적절한 것인지 고민도 되었다.
심리검사를 주로 하는 임상심리사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마주 보고 상담을 하는 상담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로 찾아오는 내담자들을 매일 같이 만날 때 상담자의 내면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한 사람의 불행하고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순수한 인간적인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매일같이 타인의 불행을 들어야 하는 사람은 - 그게 직업인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 상황을 버틸 수 있는 방어기제가 필요하다.
많은 상담자들은 직업이 끝난 후 같은 상담자들끼리 수다를 떤다. 디테일하게는 아니어도, 자신의 상담 사례를 이야기 나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괴롭게 했던 내담자를 흉보거나, 이해할 수 없는 내담자에 대해 다른 상담자의 의견을 묻기도 한다. 그것은 내담자가 보기엔 몹시 불쾌하거나 비윤리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 대부분의 상담자들은 그래야 살 수 있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다.
상담자로 일하면서 역시 나의 내면에 상반된 두 가지 고민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상담 시간 동안 내담자를 더 많이 공감해주고, 같이 감정을 느껴줄까 하는 고민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내담자가 가져온 깊은 수렁 같은 감정에 - 적어도 나는 같이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내담자의 감정에 이입하여 깊은 공감을 형성하는 것도 능력이고, 내담자의 감정과 충분한 안전거리를 둘 수 있는 것도 능력이었다.
상담할 때는 더 많이 공감하고 싶었고, 상담이 끝나면 그만 좀 공감할 수 있었으면 했다.
치료장면에서 본격적으로 일하면서부터 내게 변화가 하나 생겼다. TV 프로그램 중에 진지한 프로그램은 절대 보지 않는 것이다. 집에 오면 그냥 개콘이나 예능 프로그램만 봤다. 마치 바보가 된 것처럼. 진지하고 슬픈 다큐나 드라마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내가 절대 보지 않는 프로그램이었다. 하루 종일 남의 불행을 듣다 보니, 적어도 퇴근 후에는 나의 행복을 찾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상담자는 직업상, 또는 기질상 감정의 전환이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 낮에 자살 시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청년의 슬픈 이야기를 한참 들어주고 마음을 나누게 되면, 퇴근했다고 갑자기 개콘 보며 깔깔대고 웃기가 되지를 않는다. 상담자도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타인의 불행한 감정을 가지고 퇴근을 하다 보면 상담자의 삶이 망가지게 된다. 상담이 끝나면, 상담자의 머리 속도 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노련한 상담자가 된다는 것은 - 더 깊은 공감 능력을 갖는 것인 동시에 거리두기도 잘 하는 능력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상담자와 다른 상담자들과 사례를 공유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상담자가 자신의 내담자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조망해줄 수 있으려면 그렇게 다른 사람의 관점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내담자가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맨날 이런 이야기만 들을 텐데 참 힘드시겠어요"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남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매일 같이 들어도, 평생을 들어도 의외로 매번 들을만하더라고요. 그게 어쩌면 적성인가 봐요. 오히려 걱정이 되는 것은 매일 같이 남의 슬픈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냥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돼요. 내담자의 이야기를 이제는 능숙히 받아줄 수 있는 전문가가 된 것인지, 아니면 꽤나 무덤덤한 사람이 돼버려서 들을만한 건지 가끔은 고민이 될 때가 있어요'
'그리고 나는 이런 이야기 듣는 것이 좋지만,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혹 내가 묻혀온 감정이 전해질까 두려워요. 되도록이면 상담시간에 경험한 감정을 집에는 가져오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잘 된다 하더라도 - 낮따로 밤따로의 이중 인생을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낮에 경험한 것을 밤에 털어놓을 수 없는 삶도 꽤나 괴상한 삶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