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은밀히 숨겨진 자기애의 욕망
나는 나에게는 자기애의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오만가지 성격적 결함이나 심리적 문제는 있을지라도 자기애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교만이나 잘난 체라는 단어에 심한 혐오감이 있고, 은근 슬쩍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의 교묘한 말투나 은근한 욕망을 기가막히게 찾아낼 줄 알았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너도 우리 반이었어?'에 해당되는 소심한 아이였고, 사회 생활을 제법 하는 동안에도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해내는 것을 더 즐기는 사람이었다.
심리학을 배우고 상담을 배우고 또 상담자로 훈련 받으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뼈저리게 자기애로 똘똘 뭉친 뻔뻔한 사람인 줄을 알게 되었다.
내면에 몰입하면서 나의 문제나 헛점들을 발견하고, 남들에게도 오히려 나의 단점과 문제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내는 작업들을 많이 하면서 나는 자기 연민의 감정에 많이 빠져있었다. 자기 연민의 감정은 쓰라릴 것 같았지만 의외로 달콤하고 위로가 되었다. 중독성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심리적인 자해 행동이었고, 명백히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위였다.
또 나는 순결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얼굴이 빨개지는 경험이었고, 또 통렬한 쪽팔림이기도 했으며, 바닥에 푹 꺼지는 일이고, 오랜 숙변을 마침내 제거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나는 나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나에게 주목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나는 교만을 싫어했지만 누군가 나보다 멋져지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가득했다.
나는 타인에게는 관대해야 된다고 되뇌였지만 그런 나의 태도에 대해 자랑스러워했고
자기에게 가혹하리만큼 스스로의 결함을 찾는데 열중이었지만 그것은 더욱 고결한 존재가 되기 위함이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데 불편함을 느꼈고, 솔직한 욕망을 꺼내는 데 부끄러웠으며, 내가 주목받지 못하거나 묻힐 때 부당함을 느꼈다.
단지 그런 불편한 마음을 모른 척 뭍고 참았던 것이다.
그리고 삶의 중요한 순간에 내가 상처 받을 때, 그래서 연기가 잘 안될 때,
내 안의 자기애는 분노의 모습으로, 비아냥의 모습으로, 집착의 모습으로, 어설픈 변명을 둘러놓는 모습으로 여지없이 드러났다. 오히려 조금은 더 추한 모습으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는 자기애가 있는가하면, 타인의 인정이 전혀 필요없는 듯한 태도로 고결한 척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한 애절한 노력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자신을 과시해도 자기애,
지나치게 겸손하려 애써도 자기애,
아니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자기애의 문제를 가진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젊을 때의 그런 딜레마에게 아직도 다 빠져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건강함에 가까운 방법은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를 과시할 필요도, 나를 가혹하게 단련할 필요도 없이 내가 그저 내 모습으로 뭍혀 어울릴 수 있는 건강하고 솔직한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것.
나는 전경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배경이 되는 그런 일을 막는 것.
심리적 초점이 나 한 명에게 집중되어 있는 한 자기애의 문제는 항상 발생한다.
(나를 사랑하든, 나를 미워하든)
그렇기 때문에 나의 문제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건강히 주의를 둘만한 다른 일들도 내 가까이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건강한 자기애 문제의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