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 이야기
상담 장면에서는 관계의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계를 맺기 어려운 경우도 많지만, 관계 자체에 메이게 되어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관계라는 감옥에 빠진 사람을 감옥에서 꺼내 주는 일도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종종 늪이나 얼음장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일과 같아서, 섣부른 동정심으로만 접근하면 상담자도 함께 빠져버리고 맙니다.
관계의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표현이 다양합니다. 관계의 문제로 힘들어하면서도 그 관계에서 나가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매맞는 아내 증후군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관계는 익숙해진 틀이기 때문에 정작 그 틀을 누군가 바꾸려고 하면 오히려 그 사람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관계의 문제를 치료하는 방법은 당연하게도 '건강한 관계의 경험'밖에는 없습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건강한 관계의 경험'을 제공하려면, 상담자 스스로가 매우 성숙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자신이 없다면, 내담자를 더 전문적인 상담자에게 빨리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상담사와 내담자가 맺는 관계의 경계선에는 두텁고 무거운 울타리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얇고 쉬이 넘을 수 있는 나지막한 담장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내담자는 그 울타리를 자신이 해 왔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험합니다. 상담자를 시험해 보는 것이지요. 부서지는지 발로 차 보는 사람도 있고, 그 낮은 울타리가 무섭다며 울고 징징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항끼와 귀염끼가 넘치던 불량청소년은 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온갖 자기 자랑을 한 시간 내내 떠들고는, 문득 저에게 "선생님, 근데 저 재수없죠??"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물어봤습니다.
(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
상담이 시작되면, 상담자는 먼저 상담자의 경계와 울타리를 보여줍니다. 내담자는 상담자를 치켜 세우며 상담자에게 친밀하게 다가오려고도 하고, 상담자를 비난하며 상담자의 울타리 멀리로 도망가기도 합니다. 도망간다고 상담자가 자기 경계를 넘어 내담자를 쫒아가면 안됩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하고 건강한 경계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내담자는 차츰 상담자의 경계가 어디인지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제 부모님같은 사람이 되어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선생님 만나는 동안에는 즐겁게 와서 많은 이야기를 할 거예요"
건강한 경계를 배운 기특한 내담자의 반응이 이랬습니다.
상담자의 경계를 파악하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면, 그 다음은 내담자 스스로가 자신의 경계를 만들어보는 연습을 할 차례입니다. 거절을 못해 다른 사람들에게 늘 이용당하던 내담자, 가족을 위해 늘 희생하느라 자신의 존재감이 없던 내담자, 타인을 믿지 못해 늘 외롭고 차가웠던 내담자 - 이들 모두 자신의 경계를 보다 건강하게 다시 만들어 봄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내담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라는 것에 대해 능숙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상황과 상대방에 맞게 적절한 곳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유지하고 관리하며, 상황에 따라 철수하기도 하고, 울타리 곳곳에 즐겁게 드나 들 수 있는 문까지 만드는 고급 기술자가 됩니다.
건강한 자존감이란, 단지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와 타인의 건강한 관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합니다. 자신에게 긍정적이라 하더라도, 남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안된다면 그것은 건강한 자존감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존감이란 단순한 '마음가짐'이 아니라, 연습하여 얻을 수 있는 '성숙함'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