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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빌 언덕 Jul 06. 2016

똥게임을 아십니까?

심리치료 보드게임의 세계

놀이치료 장면에 쓰이는 보드게임은 대부분 유명한 외산 게임이고, 규칙도 어려운 경우가 많아 막상 놀이치료를 해보면 아이들은 익숙하고 간단한 몇 가지 보드게임만 반복해서 하는 일이 많았다. 나는 한국 정서에도 맞고, 아이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게임이 없을까 고민했다.


또한 친구 사귀기, 감정 표현하기 같은 구체적인 기술을 배우는 게임도 필요했는데, 일부 심리학자가 만든 심리치료용 게임은 유익하기는 하나 게임으로서의 재미가 전혀 없었다. 어릴 때 부루마블 같은 게임을 재미나게 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재미없는 게임은 아무리 유익해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재미도 있고, 유익도 한 게임이 필요했다. 

어릴 때 문방구에서 50원을 주면 살 수 있었던  뱀-사다리 게임. 규칙은 단순해도 우연성이 커서 할 때마다 재미있다. 

다행히 나는 심리학자로는 드물게 만화도 그릴 줄 알았고, 오리고 붙이는 손재주도 있었다. 그래서 상담과 집단프로그램에서 필요한 교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면서 탄생한 몇 가지 보드게임이 있는데 그중 대표작이 '똥게임'이다. 


똥게임은 위에 나온 뱀-사다리 게임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규칙도 거의 똑같지만 다른 점도 몇 가지 있다. 그러한 차이가 일반 게임이 아닌, 심리 치료용 게임답게 만들어준다. 

말랑 말랑 똥게임


게임 참여자는 일단 게임 시작 전에 클레이로 자신만의 똥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똥을 만드는 과정부터가 이미 신나는 놀이이며, 치유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똥은 놀이치료 장면에서 가장 자주,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거대하고 다양한 똥들의 향연
똥이 더럽다며 못하겠다고 징징대던 새침한 여학생은 결국 무서운 '뱀 똥'을 만들어 내며 자랑했다. 옆에는 풀칼라 염소똥.


똥이 준비되면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뱀-사다리 게임과 같이 주사위를 굴려 목표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물음표 칸에 걸릴 때마다 찬스카드를 열어 명령대로 해야 하는데, 찬스 카드 중에는 내 똥을 다른 사람 앞에 지뢰처럼 던져놓는 내용이 많다. 타인이 내 똥을 밟으면 미끄러져서 5칸을 뒤로 가야 한다. 한 친구가 똥을 밟아 미끄러지면, 자기 똥을 던져 놓은 친구는 엄청나게 통쾌해한다. 


한편으로는 찬스카드 중에는 똥을 밟아도 미끄러지지 않는 '화장지'카드도 있다. 그러나 화장지카드는 자신이 갖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반드시 선물해야만 한다. 이 화장지 카드 때문에 이 똥게임은 본격적인 '치료용' 게임이 될 수 있다. 


자기 혼자만 운이 좋거나 애를 쓴다고 우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로부터 화장지카드같은 좋은 카드들을 많이 받아야만 우승할 수 있다. 다른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으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자신이 먼저 선물을 하고, 상대방을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아이들 스스로 우여곡절과 다양한 사건을 만들어내게 된다. 


치료자는 게임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게임의 진행자로 남아 있으면서 아이들을 격려하고, 중재하고,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또 치료자의 조언을 받아) 다양한 시도를 하고, 해법을 찾아 나간다. 


나 혼자만 1등 하겠다고 얌체 짓을 하던 아이가 주위의 미움을 사 결국 연달아 똥을 밟아 꼴등이 되는 모습, 꼴등이던 아이가 친구들의 배려와 도움을 받아 1등이 되는 경험들을 하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것의 기쁨과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똥게임의 모토는 '친구의 도움 없이는 이길 수 없다'이다.


이 외에도 사회성 증진을 위한 집단 프로그램을 위해 몇 가지 보드게임을 만들었는데, 각각이 다루는 주제는 조금씩 틀리다. 

나의 소중한 보물 찾기 게임
간단한 종이배가 사실감을 더해 준다.

보물찾기 게임은 턴 방식의 해상 전투 게임이다. 참가자들은 주사위를 굴려 여기저기 섬을 다니며 보물을 모으는데 보물이 있는 섬으로 막히지 않고 가려면 운전을 잘 해야 한다. 너무 욕심을 부려 이상한 카드를 갖게 되면 그만 해적선으로 변하게 되어 다른 보물선들을 약탈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결국 최후에 가장 많은 보물을 얻은 사람이 우승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보물이다. 보물 카드에는 '친구', '간식', '칭찬' 등과 같이 자신에게 가장 기쁨이 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적어 보물로 사용한다. 그리고 게임 후에는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순서로 이어진다. 때로는 이야기 나눔 중에 서로에게 주고 싶은 것을 선물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나누게 해주는 게임이다. 


알록달록 감정인생 게임

감정인생게임은 부루마블처럼 돌고 돌다 끝나는 게임이다. 포스트잇에는 각자가 경험했던 좋고 나쁜 경험들이 적혀 있으며, 숫자로 표현한 그 감정의 크기에 따라(+/-) 칸에 걸린 사람은 전진과 후진을 하게 된다. 학교에 안 갔던 일들이 어떤 아이에게는 +100점이 되고 어떤 아이에게는 -20점이 되기도 한다. 같은 사건이라도 서로 다르게 느끼게 된 이유와 차이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고, 같은 감정을 경험한 다른 친구가 있다면 서로를 공감해주는 연습도 하게 된다. 


이 게임은 승부나 놀이보다는 치료사가 좀 더 개입되어 이야기를 풀어주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게임이다. 하지만 역시나 주사위를 통한 승부가 아이들을 즐겁게 해준다. 




치료 장면에서 사용되는 보드게임은 몇 가지 특징이 필요한 것 같다. 


1. 규칙은 되도록 단순하고, 참여자가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을 것

2. 지나치게 경쟁적이거나 실력만을 겨루기보다 적절한 우연성 부여를 통해 난이도를 줄이고, 재미를 늘릴 것

3. 참가자의 태도, 감정, 성격 특성, 가치관 등이 놀이 과정에 잘 묻어날 수 있을 것

4. 아이들이 친근하게 생각하는 상징이 많이 담겨 있을 것

5. 디테일한 사전 설계보다는 많은 빈틈을 만들어 아이들의 상상력으로 메꾸게 할 것


이러한 고민 때문에 앞서 소개한 내가 만든 보드게임 외에도 즉석에서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만들어서 하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이 각자 만든 보드게임을 연결해서 하나의 커다란 주사위 게임을 만드는 방식

치료용 보드게임은 참여자의 관여도가 높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런 '미완성'의 게임에 낯설어하기도 하지만 곧 금방 적응해서 스스로 게임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게임에 사용되는 상징이나 규칙, 목표 등을 아이들이 직접 설계하기도 한다. 서로가 만든 게임을 서로 바꿔해보기도 하면서 어떻게 해야 더 재미가 있는지 스스로 알아 간다. 아이들이 게임 개발자가 되어 간다. 


놀이치료나 집단 프로그램에서는 보드게임이 빈번히 사용되지만 치료용으로 적절한 게임을 직접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에 일부 시판되는 치료용 보드게임은 해외의 치료용 게임을 수입해 번역한 것에 그치고 있고, 그 내용이나 설계가 너무 게임스럽지 않고, 진부하게 교육적이어서 사용하기 민망할 정도이다. 하다못해 디자인 자체도 너무 수준이 떨어진다.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중단되었지만, 우리나라 문화와 환경에 맞는, 그리고 아이들이 정말 재미있어하면서도 유익한 게임을 계속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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