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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빌 언덕 Jun 01. 2016

보드게임의 치료적 활용

보드게임을 활용한 심리치료 이야기


브런치에 이제까지 제법 진지한 글을 많이 올렸지만 사실 나는 대학원 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기를 어린이, 청소년의 상담과 심리치료를 하며 보냈고, 어린이와 청소년들과 꽤 즐겁게 놀 줄 아는 상당히 재미난 사람이다. :)


상담 장면에서 나는 특히 보드게임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부루마블이나 할리갈리 같은 상용 게임 외에도 아이와(청소년과) 함께 직접 보드게임을 만들어 사용했다. 모든 놀이치료가 그렇지만 보드게임 만들기에서도 아이들은 자기의 문제를 도구에 드러내고 스스로의 힘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왕따가 되는 게임

사회성이 부족해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사회적 기술을 배워가는 집단 프로그램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익히면 좋을 여러 사회적 기술-예를 들면 친구 칭찬해주기 등-을 보드게임을 통해 배울 수 있게 준비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런 건전한 게임을 몹시도 지루해했다. 난 난처해졌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왕따가 되는 게임'을 생각해 냈다.


"자 여러분 누가 누가 왕따가 빨리 될 수 있을지 좋은 아이디어를 내보세요!!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왕따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웃긴 질문에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웃다가 곧 재미를 느끼며 곧 왕따가 될 수 있는 다양한 행동을 적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왕따 경험자였고, 경험에서 나온 일들을 적어나갔다. 게임을 함께 만든 후 같이 주사위를 굴려 게임을 하며 우리는 모두 깔깔대고 웃었다. 누가 왕따 칸에 걸릴 때마다 칸에 내용을 적은 아이가 그 칸을 설명하며 자연스레 자기 경험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내 시간에 뻔한 사회적 기술을 배우기보다는 자신의 상처를 남들과 편하게 나누고, 그것을 재미로 비틀어버리는 시간으로 삼았다. 아이들의 아픈 경험을 억지로 교정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했다.


학교 탈출 게임 - 공식적 땡땡이 치기 게임

우리나라 아이들 중 학교 가는 것이 재미있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특히 공부가 어려워지는 중학교 때가 되면 학교는 점점 숨을 죄어오기 마련이다.


모든 경험은 좋은 보드게임 소재가 된다. 공부 부담에 시달리는 청소년을 상담하다가 어느 날은 학교 탈출 게임을 제안했다. 이것은 철학적 의미는 전혀 없는 단순한 카타르시스용 게임이다. 주사위를 굴려 복도를 지나 쫓아오는 학주를 피하고 매점에서 빵(아이템)으로 체력을 회복하여 마침내 교문을 나서는 사람이 우승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아이는 게임을 재미나게 하고서는 이 게임을 친구들과도 해보고 싶다며 게임을 학교에도 들고 갔다.


경험하는 일상이 어렵고 힘들어도 상상과 유머가 허용되는 놀이 장면에서는 모든 경험은 좋은 나만의 소재가 되고 아픔은 유머와 카타르시스로 바뀔 수 있다.


감정 인생 게임 - 사건에 대한 감정의 크기를 숫자로 적는다

상담 장면에서 중학교 남자 청소년은 가장 상담하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발달적으로 모든 것이 경계선에 머물러있고, 언어를 통한 속 깊은 대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늘 짧고 생각은 단순하게만 보인다.


아이는 자신의 인생에 있을 법한 일들과 그 일이 주는 감정을 +\-의 숫자로 적었다. 게임을 만든다는 핑계가 있으니 제법 진지하게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다. 자기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자신도 자녀를 출가시키는 칸에 감정의 수자를 적을 땐 그것이 얼마만 한 감정일지 생각해보느라 고민도 길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임종하게 되는 칸을 적을 때 아이는 +점수와 -점수를 함께 적었다. 인생을 나름대로 알차게 잘 살고 눈을 감을 때의 그 감정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 그리고 감사하고 만족하는 잔잔한 기쁨도 있으리라. 생각이라곤 도통 없어 보이는 중2병 아이는 그런 멋진 생각을 해냈다. 아이가 적는 칸칸 마다가 모두 아이와의 대화 소재가 되었다. 게임을 만드느라 막상 게임은 하지도 못했지만 아이는 작업을 상당히 재미있어하였다. 그 자체로 충분한 작업이었다.


대장 대모험 게임 - 쾌변을 위하여!

때로는 똥 싸는 것조차도 게임이 될 수 있다. 특히 이 게임은 여러 명의 협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각자 자신이 맞은 파트를 나름의 그림과 내용으로 그렸다. 완성 후 다 같이 게임을 하다 보면 누구의 파트가 더 재미있는지 경험해보는 재미가 있다. 우리의 몸 안에서 이렇게 재미난 일들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아이들을 더욱 흥분되게 해준다.


심리적 문제를 가진 많은 아이들이 유분증이나 유뇨증을 겪는 점을 보면 배변은 아이들의 마음의 문제를 남들에게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치료 장면에서 똥의 문제는 중요한 주제로 많이 나오기도 한다.


축구 게임 - 의외로 포지션 배치가 중요하다

자녀가 게임이나 스마트폰에 중독되었다고 하며 찾아오는 부모에게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게임중독은 병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누구나 재미있는 것을 찾아다니고, 열광하는 게 당연해요.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라고 어른들이 온갖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놨는데 당연히 재미있겠죠. 게임중독을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바로 게임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요즘 게임은 그래픽도 현란하고, 게임 구조도 엄청 잘 짜여 있다. 그런데 나는 치료 장면에서 하다못해 부루마블 같은 -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온 게임조차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어릴 때 동네 문방구에서 100원 주고 사서 하던 그 게임을 아이들에게 알려준다. 디자인이랄 것도 없고, 중간에 내가 내용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그런 편하고 자유로운 게임이 나는 좋다. 정해진 게임 규칙을 파악하고 지키느라 힘 빼지 않고, 아이와 함께 게임을 만들어나가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현란한 게임에 익숙한 아이들도, 내가 소개하여주는 이런 단순한 게임을 참 좋아한다.



재미있는 보드게임을 활용한 심리치료라고 해도 주목적은 심리치료에 있다. 그런 면에서 그냥 보드게임을 활용해 아이와 놀아주는 것과는 차이점이 있다.


게임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놀이 속에서 아이가 마음껏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은 감정을 다루는 일이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게임은 매우 재미있어야 한다. 유머와 위트, 금기에 대한 일정한 허락, 통렬한 뒷다마 그런 것 역시 소중한 치료의 도구이다.


요즘같이 게임이 현란한 시대에, 의외로 이런 아날로그적인 방법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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