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문 앞에서> 제3장. 좋은 세계1 - 도벽
“들었죠?”
상담실에 들어 온 하진의 첫마디이다.
자기를 포기하라는 듯, 체념하듯 말을 이었다.
“전자담배 훔친 거요.”
영애는 놀라지 않았다.
영애의 반응은 부모님의 반응과는 너무 달랐다.
어제 학교와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을 때, 엄마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너 정말 어쩌려고! 왜 그랬어? 엄마 죽는 꼴을 꼭 봐야겠어?’
엄마의 울부짖음과 몸부림에 하진은 머리가 울리고, 심장이 요동쳤다.
그 순간, 하진도 소리쳤다.
‘기분 좋으면 되지, 뭐가 어때서요?’
자신의 목소리로 덮으려고 했나 보다.
엄마의 찢어지는 소리를.
그때가 떠올라 심장이 다시 두근거릴 때쯤, 영애의 미소를 보았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영애를 보자, 하진은 순간 멈칫했다.
‘혹시 아직 모르는 건가? 알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 똑같으니까.’
영애는 조용히 다가와 물 한 컵을 내밀었다.
그 손짓은 ‘넌 여전히 소중하다’라고 말해주었다.
하진은 울컥 목이 메어 얼른 물을 받아 마셨다.
“선생님은 왜 묻지 않아요?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왜 전자담배를 훔쳤느냐고요.”
영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 그거? 너도 알 텐데? 이미 아는 걸 뭐하러 물어봐?”
별일 아니라는 듯한 영애의 분위기에 맞추려 하진도 웃음을 흘렸다.
“아, 그거요? 욕구를 충족하려고요?”
“그렇지. 살려고 하는 건데, 어쩌겠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하진에게 영애는 말했다.
“이번 일로 아주 힘들었구나? 부모님이 실망한 모습…. 너, 마음 쓰였니?”
하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넌 부모님이 속상한 게 싫구나. 참으로 예쁜 마음이네.”
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입에 갖다 댔다.
내가 정말 부모님이 속상한 게 싫었을까?
부모님은 나를 늘 나무랐고, 나도 내가 부모님을 속 썩인다고 믿었는데….
부모님 속상한 게 싫었다면, 나는 왜 그랬던 걸까?
학교에선 문제아.
집에선 골칫덩이.
그런데 이상하게 이 상담실에만 오면, 조금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달라질까?
집에서의 내가 진짜일까?
상담실에서의 내가 진짜일까?’
하진은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주워 상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테이블 위에는 그림 카드가 있었다.
하진은 그림 카드를 손가락으로 밀어 늘어놓았다.
“오두막이네요. 바다도 있고. 집 짓는 사진. 원주민 춤도 있고.”
영애는 그림과 하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맘에 드는 그림이 있니?”
“그럼요. 여기 바닷가에 가족이 손잡고 서 있는 뒷모습요.”
“또?”
“여기 웃는 모습요. 엄마 아빠 아이가 서로 바라보며 웃고 있네요.”
“이 그림을 고른 이유가 있을까?”
“행복해 보여서요….”
잠시 후 영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예전에 부모님과 행복했던 적이 있었니?”
하진은 먼 곳을 응시했다.
“…공군의 날 비행기 쇼도 갔었고, 캠핑도 다녔어요. 유치원 때 학예회엔 엄마 아빠랑 할머니까지 오셨어요.”
“그랬구나. 그 기억들…. 사진처럼 선명하니?”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앨범 속 사진처럼요. 햇살 아래 매트, 종이컵에 주스 나눠 마시던 거…. 아빠 웃음소리, 엄마 손…. 그게 아주 또렷하게요.”
영애는 조용히 웃었다.
“네 ‘좋은 세계’에 그런 그림들이 있구나. 지금은 어때? 요즘 너의 머릿속 앨범엔 어떤 사진들이 있어?”
하진은 영애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친구요. 게임, 운동, 핸드폰, 전자담배… 전부 친구랑 관련된 거네요. 부모님은… 없어요.”
“그렇구나. 사실 ‘좋은 세계’에 들어가는 그림의 조건은 아주 단순해. 욕구를 충족해 주는 거야. 비싼 것, 옳은 것, 장래의 이익 같은 건 그다음이지. 왜냐하면 잘 사는 것보다 살아남는 게 더 먼저거든. 살아 있어야 잘 사는 것도 기대할 수 있으니까.”
영애의 밝은 목소리는 하진이 열거한 것들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도로 들렸다.
게다가 ‘전자담배’나 ‘훔친’, 이런 말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엄마처럼 선생님도 이런 걸 문제 삼으면….
엄마에게 대들듯 반격할 준비가 이미 되어있었다.
‘형이 공부해내듯이, 내 힘으로… 나도 해낼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그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지! 전자담배가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고!’
하지만 선생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근데 부모님은 나쁘다고 하잖아요?”
영애는 웃으며 짧게 말했다.
“넌 정당해.”
하진은 그 말에 가슴이 뻥 뚫리고 어깨가 펴졌다.
그리곤 그 이유가 궁금해 영애를 쳐다봤다.
“너는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겠지. 욕구를 충족한다는 건 뭐라고?”
하진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살아남는 것.”
“선생님, 그런데요. 저는 게임을 하고 싶은데, 왜 엄마는 제가 공부하길 원할까요?”
하진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영애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마다 욕구를 충족한 경험이 다르겠지? 네 앨범이랑 엄마 앨범이 같을까?”
“핸드폰 앨범이요? 아니죠. 엄마는 꽃 사진이 많아요.”
“그렇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사진첩에 저장하지 않겠어?”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결국 원하는 게 달라서.”
하진은 얼굴을 내밀며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왜 그래요? 엄마는 왜 제가 원하는 건 늘 나쁘다고 해요?”
영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사람이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중요하고, 남이 원하는 건 덜 중요하다고 여겨.”
그녀는 하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도 그런 경험 있었니?”
하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전 스테이크가 좋은데, 엄마는 비빔밥이 좋다고. 전혀 이해가 안 돼요.”
두 사람은 잠시, 같은 무게의 웃음을 웃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함께 있음’이 실감이 났다.
잠시 뒤, 하진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부모님은 제가 친구 잘못 만나서 망가졌다고.”
영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중요한 얘기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하지?”
영애는 하진의 눈빛을 보고, 목마름만 달래주듯 물었다.
넌 친구가 좋을 때는 친구가 하자는 거 했지?”
“네.”
“엄마가 좋았을 때는 엄마가 하자는 대로 했었고?”
“그렇죠.”
영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진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도 같다.
지금은 뭐라고 말로 옮길 수는 없지만.
영애는 잠자코 있는 하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네 욕구도 충족하는 게 가능할까?"
“그럴 리가요. 절대로 불가능할걸요?”
영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니, 가능해. 가능하고말고. ‘좋은 세계’에 담긴 그림들이, ‘Quality’한 것이라면 말이야.”
“Quality… 그게 뭐예요?”
* * *
영애는 하진이 나간 뒤 상담일지를 폈다.
부모님이 나무라는 하진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표현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살아남으려는 동기는 정당하다는 뜻이었다.
좀 더 바람직한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교육은 잠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우선은 하진이 자기 지지를 해야 힘을 낼 테니까.
깍지 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적어 내려갔다.
부모가 어떤 행동을 싫어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쓰는 하진.
부모와의 관계가 좀 더 회복된다면, 하진은 부모가 원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신호다.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과거에 당신이 행복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지금도 그때처럼 되었으면 좋겠나요?
앞으로 당신의 삶은 어떻게 변하길 바라시나요?
누구의 어떤 모습이 부러운가요?
당신을 기쁘게 해줄 당신의 ‘좋은 세계’인 사진첩에는 어떤 사진들이 있나요?
※좋은 세계(quality world)
좋은 세계는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었거나 충족될 거라고 믿는 그림(picture)들이 들어있는 개인 고유의 특별한 세계이다.
좋은 세계 안의 그림들은 사람, 사물, 신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물과 신념은 사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누구나 ‘좋은 세계’ 안에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사진들이 있다.
그러나 이 사진들이 모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