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문 앞에서> 제4장. 좋은 세계 - 문제아
“그때 할머니가 안 계셨더라면….”
하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초등학교 때였어요. 엄마가 아빠랑 싸우고, 집을 나가서, 저는 이불 속에서 울었어요. 그때 누군가 다가와서… 제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어요.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이불 위로 제 머리에 얼굴을 대고 말했어요. ‘좀 울어도 된다.’라고, 그렇게… 제 등을…”
하진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하진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속눈썹이 젖어 내려앉았다.
“그날, 할머니가 안 오셨다면… 전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영애는 속삭이듯 말했다.
“할머니가… 널 지켜주셨구나.”
“네…. 제가 가출하지 않은 것도, 할머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걸요.”
“지금은?” 영애는 물었다.
“지금요?”
하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어요. 제가 위해주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엄마 아빠는 밥해 주고, 재워 주고, 용돈도 주지만. 그것 말고는… 엄마 아빠의 모든 것이, 다 힘들어요.”
그 말끝에 하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도… 문제아가 된 것도… 부모님을 힘들게 하고 싶어서일지도 몰라요.”
영애의 미소는 입술에만 머물러 있었다.
“엄마 아빠는… 네 ‘좋은 세계’ 안에 없니?”
하진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는 죽었어요. 진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제 안에서요. 외롭고, 힘들고, 심심할 때… 엄마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엄마가 뭐라고 말해도… 안 들려요.”
영애는 고개를 기울여 하진을 보았다.
하진에게 엄마는 죽었다고?
단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하는 죽음.
니체가 말했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신이 죽어도 세상은 돌아간다지만, 엄마가 하진의 '좋은 세계'에서 빠져 버렸다면, 하진의 삶은 통째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다.
엄마의 가르침이 더 이상 하진에게 먹히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침묵이 길어졌다.
하진은 영애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젠 친구에게 연락해요. 뭔가 생각이 나면요. 제겐 친구 말만 들려요. 친구가 하자고 하면 거의 다 해요.”
영애는 하진이 자신의 마음을 읽어내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렇구나. 네 ‘좋은 세계’ 안의 그림이 바뀌었구나. 엄마에서 친구로. 그런 경험이 또 있을걸?”
하진은 잠시 생각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어릴 때는 사탕이나 장난감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아니죠. 핸드폰이 제일 중요해요.”
하진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놓았다.
영애는 미소 지었다.
“‘좋은 세계’ 안에 있던 그림은 빠지기도 하고 새로운 그림이 들어가기도 한다니까, 어때?”
하진은 눈을 들어 천정을 쳐다봤다.
“엄마 아빠도 제 ‘좋은 세계’ 안에 영원히 있을 거라 보장은 못 하겠네요. 더 이상 제 욕구를 충족해 주지 않으면….”
영애는 다짐받듯 물었다.
“혈연관계라고 해도?”
하진은 멈칫한 후 대답했다.
“네.”
하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말로 꺼내는 것이 내키지 않는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애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부부관계는 어떤 것 같아? 혼인 서약을 하고 혼인 신고를 했어도, 그 관계가 보장될까?”
하진은 얼른 고개를 돌려 영애를 쳐다봤다.
“서로의 ‘좋은 세계’ 안에서 빠진다면 말이야.”
하진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진은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 것 같네요. 부모 자식 사이에. 부부 사이에. 영원한 관계는 없는 거죠?”
영애도 말없이 눈으로만 대답했다.
“엄마 아빠도 서로에게서 마음이 떠나가고…. 저도 그래요. 아무리 엄마라고 할지라도 제 마음은 옮겨 갈걸요? 제 욕구를 충족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서요. 제 욕구를 충족해 주는 다른 사람에게로 말이에요.”
하진은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엄마는 서운해하시면서 제가 친구 때문에 망가졌다고 하겠지요. 제 ‘좋은 세계’에서 밀려난 줄도 모르고….”
영애는 대꾸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때 밝게 쏟아지던 햇살이 구름에 덮여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빛이 사라질수록 방 안은 점점 어두워졌다.
변덕스러운 봄날이다.
누군가가 좋은 세계 속에서 밀려나듯, 햇살이 구름에 밀려나고 있다.
영애는 이제야 하진의 말을 거들었다.
“마음만 떠나는 게 아니지. 엄마가 네 ‘좋은 세계’에서 빠지면 엄마와 관련된 모든 것도 함께 빠지니까.”
하진은 동그란 눈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영애는 말했다.
“좋은 세계 안의 그림들은 사람, 사물, 그리고 신념들이 있거든. 그런데 사물과 신념은 사람하고 붙어 다녀서 말이야.”
하진은 이제야 표정이 느슨해졌다.
“아, 그러니까. 그래서. 엄마가 좋을 땐 엄마 말만 들었는데 친구가 좋을 땐 친구 말만 듣게 되는 거네요.”
“맞아, 사물도, 신념도 결국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거지.”
하진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개를 숙인 하진의 얼굴을 보려는 듯 영애도 고개를 낮춰 조용히 물었다.
“하진아… 할머니는 지금 어디 계실까?”
“천국이요.”
“그럼 할머니는 지금도 너를 바라보고 계시겠지?”
“네… 아마도요.”
“그런 할머니가 지금 너를 본다면, 어떤 마음이실까?”
하진은 어물쩍거렸다.
잠시 후, 뚝 떨어지는 한마디.
“슬프실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해?”
하진은 자기 몸을 훑어봤다.
“제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산다는 건?”
“학교도 안 가고, 게임만 하고, 전자담배 훔치고, 경찰서까지 가고… 여기 상담실까지 오고… 부모님은 저 때문에 매일 힘들어하고…”
영애는 미소 지었다.
“우리가 흔히 개과천선이라는 말을 하잖니? 사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가능할 거야. ‘좋은 세계’ 안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나도 원하게 된다는 뜻이거든.”
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영애는 부드럽게 말했다.
“할머니는 네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실까?”
하진의 목소리는 기도 소리 같았다.
“학교 잘 다니고, 나쁜 짓 안 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속 안 썩이고… 그렇게요.”
영애는 자칫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뻔했다.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살아있는 엄마 아빠는 하진에게는 죽어있고, 이미 죽은 할머니는 살아있다는 것이.
다행히도 영애는 희망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비록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하진의 '좋은 세계' 안에는 살아계시니까.
할머니의 옛날 가르침이 지금의 하진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할머니는 네가 ‘Quality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는 거구나.”
영애는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니? Quality 조건 여섯 가지.”
하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읽었다.
Quality의 조건
1. 기분이 좋다.
2. 유용하다.
3. 나의 욕구가 충족된다.
4. 너의 욕구도 충족된다.
5. 건설적이다.
6. 발전지향적이다.
하진은 다 읽고 나서 영애를 쳐다봤다.
“하진아, 네가 이런 삶을 살았던 때가 있었지?”
하진의 시선이 멀어졌다.
“있었어요.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요. 그리고… 엄마 아빠가 서로 잘 지내던 때요.”
영애도 하진과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그래. 예전에 한번 해봤던 거니까. 다시 해볼 수도 있겠지? 여건만 된다면 말이야."
하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지도요.”
그때, 유리문 밖으로 그림자가 스쳤다.
영애가 시계를 봤다.
“어머, 벌써 시간이 다 되었네. 오늘도 너무 빨리 갔지?”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다음 주에 또 오면 되죠.”
* * *
가방을 멘 하진의 발걸음은, 전보다 훨씬 가벼웠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 돌아본 순간, 정수 실장과 영애의 말다툼 같은 장면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불편했다.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은 누가 당신을 좋아해 주기를 원하나요?
그 사람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지금 당신은 그 누구의 ‘좋은 세계’ 안에 살아 있나요?
혹시 그 사람의 ‘좋은 세계’에서 빠진 죽은 사람이 되어, 당신의 어떤 말도 먹히지 않나요?
※Quality의 6가지 조건
Quality의 6가지 조건은 내 행동이 내 욕구 충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건이다.
어떤 행동은 기분 좋아도 유용하지 않다.
이런 행동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결국 내 욕구 충족을 방해한다.
내 욕구만 충족하거나, 너의 욕구만 충족하면, 관계가 망가진다.
관계가 망가지면 궁극적으로 내 욕구 충족이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