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문 앞에서> 제6장 전행동2 - 증상
“병원 갔다 오느라 조금 늦었어요.”
하진은 기운 없이 말했다.
“어디가 아팠어?”
“배요.”
하진은 얼굴이 창백했고, 손으로는 배를 살짝 감싸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어제 아빠가 퇴근하시고 말했어요. 언제까지 상담만 받고 있을 거냐고요. 인제 학교 가야 하지 않냐고요.”
하진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알겠다고 말은 했는데, 오늘 아침엔 정말… 누워있다가 겨우 병원에 갔어요.”
하진은 배를 움켜쥔 채 영애의 반응을 예상해 봤다.
아버지는 한심하다는 눈빛이었고, 엄마는 ‘넌 맨날 배가 왜 그 모양이니?’라며 원망했다.
내가 학교에 못 가는 걸 더 걱정해서다.
선생님은 어떨까?
엄마처럼 원망할까?
아빠처럼 한심하게 여길까?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 밀려왔다.
영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배가 아팠던 적이 있었니?”
“네… 학교 다닐 때요. 거의 매일 아팠어요. 수업 시간엔 화장실을 들락거렸고요.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 학교를 쉬게 된 거예요. 병원에서는 신경성이라고….”
“엄마, 아빠는 뭐라고 하시니?”
“아빠는 제가 정신력이 약하대요. 아빠는 개천에서 용 난 분이시거든요. 선배에게 얻은 문제집 지워 가면서 공부를 혼자 힘으로 했대요. 그래서 그런지… 저를 이해 못 하세요. 부족한 거 없이 다 해주는데, 성적이 왜 그 모양이냐고요.”
하진은 눈을 떨구고 말없이 있었다.
하진은 개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요… 예전엔 아빠랑 싸울 때, 아빠가 저를 몰아붙이면 제 편을 들어줬어요.”
그건, 엄마가 나를 지키려던 게 아니었다.
나를 엄마 편으로 만들어 아빠에게 맞설 세력을 가지려 했던 거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정수 실장님이랑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공부 모임이라며… 그 뒤로는 엄마도 달라져, 엄마 아빠가 똑같이 말해요. ‘공동 전선’을 펴야 한다나… 제가 의지가 약해서라고요.”
조용히 듣고 있던 영애가 말했다.
“너는 네 의지가 약하다고 생각하니?”
하진은 망설이다 되물었다.
“아닌가요?”
하진은 속으로 영애의 반응을 짐작했다.
언제나 그랬듯, 예상은 빗나갔다.
엄마 아빠처럼 혼내지도, 속상해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았다.
맞다. 바로 그거였다.
영애샘은 내 행동을 평가하지 않았다.
영애샘은 늘 내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배 아픈 것에도, 부모님이 문제 삼는 내 행동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선생님이 주목한 건 엄마 아빠의 반응이었다.
그 반응이 내 증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영애는 서랍에서 지난번과 같이 동그라미가 네 개 그려져 있는 종이를 꺼냈다.
“기억나니? 모든 행동은 네 가지 요소가 함께 움직이는 ‘전행동’이라고 했지?”
“네. 활동하기, 생각하기, 느끼기, 그리고 신체 반응이요.”
영애는 미소 지었다.
“네가 아침에 배가 아팠던 건 신체 반응이고, 그와 동시에 활동하기, 생각하기, 느끼기 요소도 있었겠지?”
“네… 등교 준비를 하면서, 가기 싫다고 생각했고, 마음이 괴로웠어요.”
“맞아. 네 마음이 힘들었던 거야. 그걸, 엄마 아빠에게 말해 본 적 있니?”
“…아니요. 저는 제가 힘든 줄 몰랐거든요. 그냥 게으르고 못난 거로 생각했어요.”
영애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영애는 따뜻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으니까, 네 몸이 대신 말해준 거네.”
하진이 어리둥절해하자, 영애가 덧붙였다.
“몸이 ‘나 힘들어요’ 하고 외치는 거라고. 네 마음이 입을 닫아버리니까, 몸이 대신 말해준 거지.”
하진은 멈칫했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서, 내 몸이 대신 말한 거라고요?”
“그렇지. 네 괴로움을, 몸이 대신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거야.”
영애는 하진의 눈을 보며 말했다.
“사실 증상은 고마운 거야. 누구는 복통으로, 누구는 두통으로, 또 누구는 공황장애로 나타나지. 겉모습은 달라도, 결국 같은 신호야. ‘나는 지금 단절되어 있어요.’ ‘나는 소중한 사람과의 연결이 끊겼어요.’ 증상은 그렇게 외치고 있거든.”
하진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정말 내 마음이 그렇게 힘들었던 거냐고.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 사람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
마음의 고통은 익숙해지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몸은 분명히 알려준다.
몸이 아프건 마음이 아프건, 아플 땐 아프다고.
하진은 다가앉았다.
“그런데요. 선생님. 마음이 힘들면 왜 몸이 아파요?”
영애는 큰 숨을 들이쉰 뒤, 부드럽게 말했다.
“뇌가 말이야. 우리의 뇌가….”
하진이 물었다.
“우리의 뇌가 하는 일이에요?”
영애는 끄덕였다.
“관계가 단절되어 심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의 뇌가 가만히 있을까?”
하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저기 차트에 ‘행동체계’라는 글자가 보이지?”
하진은 영애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뇌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욕구를 채우려 해. 기존의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예전에 안 하던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내지. 조금이라도 다른 시도를 해보는 거야.”
하진도 손끝으로 차트를 가리켰다.
“저거요? 저게 뇌가 하는 창조적 과정이에요?”
영애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맞아! 증상은 뇌가 창조적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행동 중 하나겠지?”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어요.”
영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뇌가 하는 일을 잘 알아차리지 못해. 게다가…”
하진은 눈빛은 다음 말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증상을 자신이 선택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해. 그저 당하는 거라고만 여겨. 증상 같은 뒷바퀴는 직접 통제가 안 되니까.”
잠시 후, 하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눈 밑 살이 파르르 떨렸다.
“선생님… 그럼, 제 마음은 왜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요?”
영애는 시선이 멀어졌다.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의미 있는 존재로 느껴지고 싶은데….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상담실 한쪽에서 돌아가던 선풍기가 점점 느려졌다.
전원이 나갔는지 날개는 힘없이 끌려가다 이내 멈춰 섰다.
영애는 선풍기가 완전히 멈추는 것을 지켜본 뒤 말을 이었다.
“마음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거든.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채 살다 보면, 어느새 지쳐버려.”
하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이내 다시 들며 추궁하듯 물었다.
“그렇게 아프면 빨리 어떻게든 치료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계속 힘들게 지내요?”
영애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단절이 원인이라는 걸 모르니까. 알더라도…. 소통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증상을 견디는 게 더 쉬우니까.”
영애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게다가 증상에는 이득이 있기도 해. 아프면 주변 사람들이 좀 관대해지잖아? 그래서 증상 속에서 잠시 쉬면서 시간을 벌기도 하겠지?”
하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이내 힘없이 내려앉았다.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아플 때 엄마 아빠의 잔소리가 좀 덜하긴 해요.”
하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내 몸이 먼저 말했던 거네요. 나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하진은 눈을 감았다.
속으로, 아주 조용히 되뇌었다.
도와주세요….
* * *
영애는 창밖으로 몸을 기울여 멀어져가는 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개천에서 용 난 아버지라니.
비빌 언덕도 없이 스스로 일군 삶이니, 아들도 그렇게 독하게 해내야 한다고 믿겠지.
그래서 원망하는 걸까.
다 가지고도 왜 못 일구냐고.
하진의 아버지는 자신이 놓친 것을 알지 못하겠지?.
가난 속에서도 격려와 신뢰를 받으며 자란 자신과 넉넉함 속에서도 존중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아들 하진의 차이를.
그리고 성취동기는 어떤 조건에서 생기는지를.
그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를 것이다.
자신은 경제적 빈곤 속에서도 심리적 풍요를 누렸지만, 아들은 경제적 풍요 속에서 심리적 빈곤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맞다. 바로 이거다.
물질적 풍요와 심리적 빈곤.
부모가 다 가졌다고 믿는 그 환경이야말로, 하진의 가장 큰 결핍이다.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은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난 증상으로 고통받았던 적이 있나요?
그때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어땠나요?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나요?
아니면 소원해졌다 싶었나요?
당신이 고통받았던 증상은 단절된 상태에서 소통을 갈구하는 ‘도와주세요.’라는 외침이 아니었을까요?
※증상
증상은 전행동을 구성하는 4가지 요소인 활동하기, 생각하기, 느끼기, 신체 반응 중 한 가지 이상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부정적인 상태일 때를 말한다.
전행동 자동차의 뒷바퀴에 해당하는 느끼기와 신체 반응이 부정적이라면 앞바퀴에 연합하는 활동하기와 신체 반응도 부정적이다.
복통과 두통 등은 부정적인 신체 반응이 두드려져 나타나고, 우울과 불안은 부정적인 느끼기가 두드려져 나타난다.
공황장애는 부정적인 느끼기와 신체 반응이 동시에 두드러져 나타나고, 강박증은 부정적인 생각하기 요소와 활동하기 요소가 두드러져 나타난다.
ADHD는 부정적인 활동하기 요소와 생각하기 요소가 동시에 두드러져 나타난다.
이 증상들은 모두 불만족스러운 관계를 다루기 위해 개인이 선택하는 대처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