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문 앞에서> 제1장. 선택 - 등교 거부
하진은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참이나 상담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한 채.
문틀에 기대어 보았다.
시선은 어느새 달아나고 싶은 곳으로 향했다.
만개한 벚꽃은 벌써 지기 시작했지만, 하진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다.
가슴이 답답한 게 기분이 안 좋았다.
“천 명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위대하다(법구경 어쩌고)."
오는 길에 본, 절에 걸린 현수막의 글자가 괜히 거슬렸다.
아니,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도 나보고 어떻게 해보라고 하겠지?
위대한 건 관심 없다.
그저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멀리서 멈춰 선 엄마가 아직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진은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밀어젖혔다.
너무 쉽게 열리자 순간 손이 멈칫했다.
그의 발걸음은 안으로 향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문밖을 향해 있었다.
벚꽃 하나가 바람에 실려 상담실 안으로 들어오자 하진의 눈도 따라 들어왔다.
영애는 상담 테이블 앞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상담실 안쪽 개인 책상에 가볍게 기대어 선 채, 잔잔하게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진은 영애의 모습이 ‘의자에 앉아라.’라고 재촉하는 압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늘 다그치던 어른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느슨한 영애의 모습은 흐르는 물 같았다.
어느 그릇에나 담길 듯이.
하진은 그게 좋았다.
긴장이 풀리자 악문 어금니도 스르르 풀렸다.
자신이 이 관계를 주도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말해야 하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하진이었다.
“엄마가 절 여기까지 데려와서 문 앞에 밀어 놓고 갔어요.
교실에 안 가려면, 여긴 와야 한다고요.”
하진은 영애를 흘깃 쳐다봤다.
영애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미소 지었다.
“그랬구나. 교실에 들어가지 않기로 선택하고, 이곳에 오기로 선택했구나.”
뜻밖의 반응에 하진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선택? 내가 선택했다고요?”
영애는 편안한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그래. 네가 선택했지. 여기 오기로.”
하진은 영애의 작은 움직임 어디에서도 자신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게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영애가 하진을 통제하려는 냄새가 조금만 났어도, 하진은 상담실 밖으로 뛰쳐나갈 명분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진은 두려웠다.
선택했다는 말이.
선택?
그 말은 책임지라는 말이지?
하진은 책임지지 않기 위해, 선택하지 않았다고 우겨야 했다.
“아닌데요? 저 진짜 선택 안 했어요. 엄마가 끌고 와서 억지로 온 건데요.”
영애는 가볍게 웃었다.
하진에게 그렇게 따뜻한 웃음을 보여준 어른은 정말 오랜만이다.
여기에 조금 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기 앉아도 돼요?”
하진이 상담 테이블 의자를 가리키자, 영애는 여유 있게 맞은편에 다가왔다.
그리고 물 한 컵을 내밀었다.
“네가 교실에 들어가지 않기로 선택한 건 맞지? 엄마가 가라고 했어도 네가 거절했으니까.”
“네, 맞아요.”
“그럼, 누구 발로 여기까지 걸어왔을까?”
“… 제 발이요.”
하진은 깨끗한 스니커즈 캔버스화를 신은 자기의 발을 내려다봤다.
“그래? 그럼 그 발을 옮기기로 누가 선택했을까?”
“… 제가요?”
영애는 웃으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앉아도 되냐고 물은 건 누구지?
“... 저요.”
“결국 앉기로 선택한 건 또 누구고?”
”... 저요?“
“내가 준 물컵을 받기로 누가 선택했을까?”
”...“
하진은 어지러웠다.
엄마 말엔 곧잘 대꾸할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영애의 말엔 반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새로운 종류의 얘기가 재미있었다.
아니 놀라웠다.
“그럼…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제 선택이라는 거예요?”
영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진이 뭔가 반박할 말을 찾고 있는데, 영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네가 잘못했다는 뜻은 아니야.”
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애를 쳐다봤다.
“아니라고요? 결국 다 제 탓이라는 말 아녜요? 제가 책임지라는 거잖아요?”
영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영애의 웃음소리는 하진과 함께하는 이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영애는 웃음을 정돈하고 하진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들렸구나. 사실 그 말은.”
영애가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하진은 따지듯 물었다.
“그럼, 사실은 뭐예요? 그 말은?”
영애는 까르르 다시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하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말은, 네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뜻이야. 네가 네 인생의 운전대를 쥐고 있다는 뜻이지.”
하진은 낯설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도 된 듯.
새로운 경험이다.
요즘 늘 듣던 말은 ‘너는 형편없다, 너 때문에 다 망쳤다.’였는데.
지금 이 말은… 뭔가 달랐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라고 믿어온 자신을 처음으로 의심했다.
하지만 선택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지금까지 내가 선택한 게 있었을까?
대부분은 엄마 아빠가 시켜서 억지로 한 것뿐이었다.
하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럼… 선생님, 엄마가 억지로 시키는 건 뭐예요?”
영애는 여유 있게 대답했다.
“엄마가 시킬 때, 따르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거절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어. 화내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웃기로 선택할 수도 있지. 중요한 건 네 욕구를 가장 잘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거야.”
욕구?
하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 욕구가 뭔데요?”
영애는 하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욕구? 그게 말이지.”
그러다 시계를 보더니 익살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에구, 어쩌나. 시간이 다 돼버렸네.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하진은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주엔 안 올 수도 있어요.”
‘안 올 수도’라는 말에 힘을 주며 슬쩍 영애의 눈치를 살폈다.
그 말투엔 센 척, 허세가 살짝 묻어 있었다.
영애는 웃으려다가 말았다.
그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래? 그건 네가 선택하겠지.”
의기양양하던 하진은 당황한 마음을 감추려 가방을 집어 들었다.
영애는 혼잣말처럼 힘을 빼고 말했다.
“엄마 요구를 거절하여 다투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다투는 대신 여기 오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어떤 걸 선택하든, 그에 따른 결과가 있겠지?”
하진은 넋 놓고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늘 듣던 엄마의 말은 자다가도 대꾸할 수 있는데, 영애의 말에 대답하려면 생각해야 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니까.
처음 경험하는 일은 또 있다.
어른과 이렇게 편하게 얘기할 수도 있다니.
게다가 ‘학교에 왜 가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 어른은 영애가 처음이다.
묻지 않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배가 아파서, 화장실 때문에 학교에 못 갔다고 말하면 뭐라고 할까?
엄마처럼 말할까?
아빠처럼?
내가 너무 예민한 성격이라고?
가방을 어깨에 메며 하진은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살짝 숙였다.
나간다는 인사이다.
밖으로 나온 하진은 중얼거렸다.
‘나는 나오기로 선택했다.’
선택.
선택이라니.
내가 정말 선택했다고?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뭘 다르게 선택할 수 있을까?
* * *
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여 영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상담실 안으로 돌아선 영애는 두 손을 가슴 앞에서 깍지 끼었다.
이번 회기는 성공이야.
하진이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니까.
그건 신뢰가 생겼다는 뜻이고, 신뢰는 변화의 문을 여는 첫걸음이니까.
앞으로 이어질 하진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
문 앞에 서 있던 하진이, 저 문을 마지막으로 나설 때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 있을까?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최근에 화를 낸 적이 있나요?
아니면 파안대소하며 크게 웃은 적이 있나요?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반대로 비난한 적은요?
요즘 내가 자주 하는 말과 행동, 생각과 감정은 정말 어쩔 수 없어서 한 걸까요?
아니면 내가 선택한 걸까요?
※선택
인간의 행동은 단순히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정보를 바탕으로 한 선택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늘 같은 행동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빨간색 신호등 앞에서도 멈출 때가 있고, 무단으로 건널 때도 있다.
전화벨이 울려도 받을 때가 있고, 무시할 때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내적 목적을 위해 행동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