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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니 Jan 18. 2024

1억을 약속받았다.

나는 그냥 헛웃음이 나온다.

  벌써 1년이 지났다. 엄마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을 제대로 폭발시켰던 그날은 재작년 11월이다.  엄마를 생각하면 항상 양가적인 감정이 들기에 동생의 일을 계기로라도 그동안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중 동생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는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같은 날 두 번째 통화였다.




 첫 번째 통화해서 동생은 홍콩에서 장애아를 키우면서 사는 게 너무나 희망이 없다고, 외국에 나가 아이를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은데, 돈을 좀 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고 했다. (장애아인 조카는 장애학교를 다녀도 홍콩 교육 특성상 크게 혜택을 보는 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땅덩이가 좁은 나라에서 임대한 아파트는 원룸 크기정도였다.) 동생 역시 처음으로 엄마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 오랫동안 고민을 했었고, 많이 긴장한 상태로 얘기를 꺼냈다고 했다. 엄마는 대답대신 나중에 전화를 준다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두 번째 통화해서 동생은 울먹이며 말했다. " 엄마, 정말 홍콩에서 사는 너무 힘이 들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힘들지.. 그렇지.. 근데... 너 남편 직장도 있고, 거기 시댁도 있고 00야 조금만 참고 살면 돼.." 누가보아도 금전적으로 도와달라는 소리였는데.. 그것도 앞선 통화에서 이미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던 질문인데, 엄마는 대놓고 모른 척을 한다. 동생의 통화는 소득 없이 끝났고 난 엄마라는 사람이 한심해서 이렇게 말해버렸다.  "00가 도와달란 얘기자나, 아니야?" 엄마는 "응 그러게..." 의미 없는 대답만 중얼거릴 뿐이다.




 우리에게 가져간 돈이 얼마건간에 지금 우리가 부모와 척을 지고 살아가는 게 아니다. 우리는 부모를 부모로 보고 살고 있는데.. 그날 나는 동생의 일을 계기로 뜻하지 않게 각성을 했다.




 엄마가 한 번쯤 진심을 담아  "우리 딸, 얼마나 힘들었니? 엄마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형편이 나으면 꼭 도와줄게. 약속하마." 이렇게 얘기를 해줬더라면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 이런 얘기는 어디 드라마에서 나오는 건가. 평소에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라고 생각하는 엄마가 이제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 되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엄마는 본인이 돈을 요구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는 그 돈을 받고야 마는 재주가 있는 거 같다. 동생에게 그랬고, 나에게 그랬고, 외할머니에게도 그랬고, 이모에게도 그랬다. 이모에게 빌린 돈으로 내 돈을 갚았고, 외할머니에게 빌린 돈으로 이모 돈을 갚고 외삼촌에게 빌리고, 그리고 갚고를 반복했다.




 아빠는 건설현장 일용직 인부이지만 성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한 지 30년이 넘는다. 중간중간 일도 잘해 작업반장을 도맡기도 했고, 건설경기가 괜찮든 괜찮지 않든 아빠는 언제나 꾸준히 일을 해왔다. 물론 중간에 아프거나 일이 없거나 건설현장 특성상 비가 많이 오는 날은 현장이 멈춰버리지만, 늘 일을 해왔다. 나는 그래서 내 아빠의 일이 일용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30년을 한 경력자, 베테랑 건설현장작업자라 생각한다. 남들에게는 건설업에 종사한다고 말했었다. 물론 매우 더워도 몹시 추워도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노동의 강도도 높았고, 이제 예순이 나이가 넘었기에 당연히 힘에 부치는 일이다. 아빠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은 너무나 싫지만 그가 가진 성실함은 인정하고 싶다.




 하지만 엄마는 아빠의 직업이 시원치 않아 평생 가족을 벌어먹일수 없다며 일정하지 않은 수입을 들먹이곤 했었다. 그리곤 우리를 늘 불안한 환경에 사는 것처럼 말해왔다. 물론 장마철과 혹한기에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한 분야에서 30년을 일한다는 건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 그 직업 덕분에 두 내외가 살고 있지 않나. 본인이 거진 20년째 쪽박 깨진 부동산 투자에 매달린 것 역시 아빠의 일이 안정적이지 않기에 노후대비를 한 것이라 변명해 왔다.




 엄마가 우리 자매의 월급을 가졌갔을 때에는 정말이지 악착같이 가져갔다. 나보다 동생이 먼저 돈을 벌어다준 과정을 보았기에 내가 월급을 받게 된다면, 어차피 엄마에게 줘야 되기에 그냥 속 편하게 주자 생각했었다. 엄마와 동생의 실랑이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기의 월급을 착취해 가는 부모에게 어찌 대거리를 하지 않은 자식이 있었을 까. 그것도 모조리 가져간 사람에게 말이다.




 엄마는 그때도 철두철미했다. 동생의 첫 월급이 들어온 날 함께 은행을 가서 돈을 모조리 인출했다고 한다. 동생을 같은 직종에 밀어 넣은 건 월급날까지 알고 있으니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큰 그림이었을까. 동생은 한 달 동안 어렵게 버틴 첫 직장의 월급을 눈앞에서 강탈당했다.




  나는 이번일을 계기로 어째서 동생을 도와주지 않는지, 왜 우리가 힘들 때 엄마는 도와주지 않는지 물었다. 그리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말을 했다. 왜 내 결혼을 그냥 시켰는지 물었다. 엄마는 힘이 들 때마다 외할머니에게 손을 벌렸고  외할머니께서 틈틈이 도와주신 걸 안다. 엄마는 엄마의 부모에게 도움을 받고 사면서 왜 우리에겐 그래주지 않았나. 우린 그래도 자식으로서 엄마를 매번 도와주고 살고 있지 않았냐고 물었다.




 엄마는 별다른 대꾸가 없다. 그러면서 당황한 눈빛으로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얘기를 꺼낸다. 그래도 "내가 너 쌍둥이 낳을 때 200만 원을 줬고,(그 200만원은 엄마 가게에서 1년6개월을 일하고 받은 두번째 월급이다.) 외할머니한테는 쌀과 농산물 등을 받기는 했지만, 받은 돈을 얼마 안 되고 그마저도 갚았다"라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모양 빠지는 변명이 돌아온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화를 내거나 기분 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었다. 내 말을 끝까지는 듣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갑자기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재개발에 들어가는 빌라가 아파트가 되어 집값이 오르면 너희에게  각 1억씩 줄 생각이었다고. 나는 그 말에 짐짓 놀랐다. 금액이 아니라 엄마 입에서 돈을 주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런 마음이 항상 있었다고 말을 한다. 그날 이야기는 나의 한탄 섞인 넋두리로 끝이 났다. 그래도 엄마가 화를 내지 않고 들어주는 것 만으로 고마웠다. 엄마가 나의 마음을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온 엄마의 문자에 우리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본인이 시부모와  시동생을 데리고 살며 포장마차를 해가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었는데.. 그래도 자식 하나 보고 살았었는데 네가 감히 나에게 훈계를 하느냐고 기가 막힌다고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본인이 나를 끌어들여 한 부동산 투자를 동업이란 말로 둔갑시켜고 네가 부동산 업무 좀 맡아한다고 내 눈치를 얼마나 보고 사는지, 그래서 손주들을 봐주는데 네가 감히 나를 훈계한다고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러면서 네가 돈 몇백 좀 줬다고 이렇게까지 부모를 무시하냐면서 환갑 때 쥤던 금목걸이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유치해서 헛웃음이 났다. 가져간 돈을 돌려주겠다는 말은 없고 엄한 금목걸이를 돌려주겠다고 하다니, 그 와중에도 딸에게 주는 돈은 아까웠나 보다.




 나는 그날 이후로 후유증을 크게 앓았다. 2주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불면의 상태가 되었다. 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 먹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엄마는 원인을 알지 못한 통증으로 정형외과에 입원을 했다. 나는 원인을 안다. 나 때문에 속병이 나 실제로 몸에 통증이 온 거다. 어떻게 아느냐고? 나 또한 많이 아팠기 때문이다. 쌍둥이를 낳고 수술했던 자리가 유독 심하게 아팠다. 항문이 내 몸속에서 빠져나올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집안일을 하면서도 시시때때로 잠시 누웠다가 일어났다를 반복했었다. 병원에 방문하니 수술했던 자리는 멀쩡했다. 다만 극심한 스트레스는 몸의 가장 약한 부위에서 통증으로 나타난다고 의사는 말했다. 나는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권고받었다. 그때의 나는 이미 엄마를 아프게 했다는 죄책감이 나의 통증보다 커져 절망감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아빠의 부탁으로 나는 엄마의 병원을 찾아갔다. 엄마는 냉담한 반응이었지만, 입원을 한 사람에게 나는 죄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과의 문자도 보냈다. 사과를 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네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풀린다. 사랑한다 딸'이었다. 그 문자가 진저리치게 보기 싫었다. 이렇게 나의 상처는 아픈 병자 앞에서 묻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었나보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부모와의 이별을 준비했었던 거 같다. 그 이후에 일어난 동생에 대한 외면은 어쩌면 내가 부모에게 벗어나기 위한 좋은 핑계였는 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연락을 안 하던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세입자의 아파트 전세 계약서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알겠다고 하고 다음날 연락을 했다. 그리고 문자를 했다. "서류 가져다 놨어, 그럼 이번엔 내 돈 갚는 거야?" 수많은 충돌이 있었던 지난해 엄마는 결국 나와 동생에게 가져갔던 돈을 갚겠다고 했었다. 이젠 엄마의 입장이나 형편 따위는 고려대상이 안된다.



 

 하지만 역시나 엄마의 대답은 엄마답게 돌아왔다. "아직은 못 갚아, 힘들어, 기다려. 내가 상황이 안 좋아 아빠도 수술하고 나도 그렇고" 언제나 방식은 똑같다. 나도 힘들다. 내가 아프다. 너희 아빠가 아프다. 쓴웃음이 난다. "더 이상 부동산 업무 하지 않겠어." 돌아오는 대답 역시 엄마답다. "그건 계속해줘, 그리고 대출받아서라도 네 돈은 갚으마, 그리고 부동산 일 할 때마다 청구해." 가져간 돈은 그냥 갚으면 된다. 아니면 늦게라도 줄 테니 기다려달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대출을 받아서 주겠다는 건 어떤 의미 일까.. "내가 이렇까지해서 갚아야 하나? "라는 반문인가. 나는 정말 내 부모에게 정을 뗄 수 있을 것 같다.




 주겠다던 1억? 비웃음이 난다. 그런 날이 오긴 올려나. 그때가선 어떤 부연 설명을 하고 그 돈을 주겠다고 할까? 내가 받을 수 있는 1억이란 내가 그동안 지불했던 금액과 그 금액의 수십 년간의 이자가 붙어서 돌아오는 건 아닐까? 기대치가 없으니 그냥 웃음이 난다. 난 정말 부모와 이별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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