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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 Jun 04. 2020

낸스 할머니와 나

“Hello from Sydney!" - Redmond Green


레드먼씨의 안부 메일을 받았다.

지금 시드니는 덥고 습하며 햇빛 때문에 커텐을 쳐놓고 지낸다는 이야기, 본다이 바닷가에 또 상어가 출몰했다는 이야기, 낸스는 아주 잘 지내며 지난 며칠 아팠었지만 지금은 연말 계획을 짜느라 바쁘다는 내가 궁금해 할 소식도 전해 주었다.


호주를 떠난지 꽤 되었지만 레드먼씨와는 정기적으로 메일을 주고받고 있다. 레드먼씨는 내가 육개월동안 시드니에서 community worker, 간호 에이전시에 소속된 간병인으로 일할 때 방문했던 낸스 할머니의 아들이다. 그리고 올해 만 93세 생일을 맞은 낸스는 내가 호주생활 할때 의지하고 가깝게 지냈던, 나의 담당 근무 스케줄이 끝나고도 인연을 이어간 다정한 나의 친구이다.


낸스는 파란 눈에 옅은 갈색 머리, 장난끼 많은 호탕한 웃음을 가진 전형적인 호주 할머니이고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지만 독서와 다큐감상을 즐겨하며, 모든 주제에 대해 ㅡ특히 정치ㅡ 신랄한 토론을 하는것이 취미인 매우 진보적인 분이다. 시드니 항구 쪽 멋진 뷰를 가진 아파트에 혼자 살며, 거동이 약간 불편해 자식들이 돌아가며 집에 방문한다. 내가 근무하러 집에 갔을 때는 항상 둘째 아들 레드먼이 함께 나를 맞아주었다.


호주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구급차를 운전하며 시드니 근방은 다 돌아봤다는 낸스 할머니는 젊었을때 프랑스 남부에서 유학을 하고, 어릴때부터 스케이트를 즐겨탔으며, 한때 스키선수로 활약한 아주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프랑스 남자들은 참 웃기단말야, 그 사람들은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작자들이란다!”


낸스는 40, 50년도 더 된 자신의 삶을 또렷하게 기억했고 많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했다. 프랑스 리옹에서의 생활, 어렸을때 부모님과의 기억, 도널드 트럼프가 인권을 말아먹는 이야기 등등 일적으로 간 두시간 이었지만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낸스를 위해 차를 만드는 시간들도 참 즐겁게 느껴졌다.


내가 더 편하게 있도록 어느 순간부터 레드먼씨는 두시간동안 자리를 피해주었다. 매주 우리는 수많은 주제에 대해 이야길 나눴고 가끔은 레드먼씨도 대화에 함께했는데 다큐DVD나 영화를 보는것을 좋아하는 레드먼씨와 낸스는 신기하게도 김기덕이나 박찬욱 감독을 알고 있었다.


"혹시 고향이 어디인지 물어봐도 될까?"


첫만남부터 낸스와 레드먼씨는 나를 편하게 해주려고 많이 애썼는데, 나로썬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매일 한 두시간 나의 할 일만 끝내고 가면 되는 캐주얼 근무제의 직원이지만, 본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예의바른 분들이었다.


“어디나라에서 왔니?”

으레 환자들이 물어보는 질문이고, 이 말로 대화를 트는건 흔한 일이다. 낸스의 샤워를 도운 후 나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 이름을 메모해두고 어떻게 읽는지 물어보던 낸스와 레드먼씨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곧이어 평소 다큐나 영화에서 보았던 한국에 대해 인상깊었던 점이나 궁금했던 문화에 대해 물어보았다. 레드먼씨는 나의 아버지보다 나이 지긋한 신사이다. 알고보니 레드먼씨는 나처럼 중국에서 오랜 생활을 했고, 독일에서 유학과 직장생활을 했다. 두분 다 유럽에서 생활을 오래 해서 내가 궁금해 하던 점도 많이 물어볼 수 있었다.


낸스와 레드먼씨가 한국에 대해 말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호주에서 일을 하면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은 적. 솔직히 없다고 하는 이민자들이 있다면 모르는 게 약인 약을 많이 삼켰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민자가 많은 나라지만 그중에서도 편견을 넘은 우월감을 표출하는 경우는 많이 볼 수 있었다.


“웰컴 투 오스트레일리아! 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나라에 왔단다.” (실제 환자 가족한테 들은말)


한국이 싫지만, 그래서 호주에 왔지만 은근 사람을 깔보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사람들을 붙잡고 "너가 생각하는건 북한이고, 나는 남한에서 왔는데 한국이 얼마나 발전했으며 한국의 GDP가 어쩌구 저쩌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애초의 그 사람의 미성숙함에서 나온 일이니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고. 욕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호주 시민이 성숙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에 대한 좋은 기억이 아직도 호주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레드먼씨는 학구적이고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유전자(?)덕분에, 아시아를 여행하며 생긴 동양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나와 대화하길 원했다. 낸스도 그랬다. 그들의 방식은 미국에 있는 첫째아들을 보러가서 미국의 화려한 관광지 대신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아름다운 호주의 자연을 누리면서 항상 호주정부의 환경 파괴에 대해 비판하는 식이다.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고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경청하길 좋아했다.


낸스와 레드먼씨가 한국에 대해 말하는 방식, 정확히는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그들의 겸손은 나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부정해도 나의 정체성은 나의 배경에서 온다는 걸 인정하게 된 것이다. 


호주에 살면서 내가 노력해도 호주 시민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 나에게 씌워지는 프레임이 싫어 국적을 물어보는 게 싫었고 한국인이라는 게 싫었던 콤플렉스까지. 나는 이 돌덩이 같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에 기쁘게 내 고향의 아름다운 점을 찾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내가 가진 열등감을 내려놓고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 'Weeping willow' .

버드나무 줄기가 눈물을 흘리는거 같아서 Weeping 이라는 이름을 붙인거야. 정말 눈물을 흘리는거 같지?"


내가 모르는 단어라고 말하자 낸스가 두 손으로 눈물 흘리는 흉내를 내며 설명해준 버드나무는 이후 내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내 영어가 심하게 짧아질 때면 낸스는 나의 입모양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대화에 공감해 주기도 했다. 한국을 훌쩍 떠나 낯선 곳에서 살 계획까지 세웠었지만 어딜 가든 내가 바란 건 공감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친구. 호주 이민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너의 결단력이 대단하다며 응원해준 낸스는 돌아온 후에도 내게 해쳐나갈 힘을 주었다. 지금도 한국에서 몇 개월에 한번 메일을 주고받고 있고, 올해는 꼭 호주를 가는 게 목표라고 전하고 있지만 기약이 없이 미뤄져 아쉬울 뿐이다. 가끔 친구가 필요할 때면 카톡을 할 수도 없고 당장 만날 수도 없는 나의 호주 친구와의 대화가 그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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