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건과 특별한 사건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참 특별한 일이었다 싶은 사건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별거 아니었던 경우도 있고, 너무나도 평범했지만 문득 떠오르는 사건도 있다. 천용성은 후자의 케이스에 집중한다.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제목을 처음 보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궁금해지겠지만 사실 김일성 얘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1994년의 평범한 하루가 담겨있다.
이런 평범한 하루는 <김일성이 죽던 해>라고 라벨링 되어 음악이 된다. 이 앨범은 기억하고 싶은 날의 페이지 끄트머리를 접어 가끔 펼쳐볼 수 있도록 표시해놓은 일기장 같다.
상처가 다 나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반대로 '내 상처는 절대 낫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상처>, 어린 시절 외톨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김일성이 죽던 해>, 소중한 사람과의 예전 기억이 생각나 추억이 담긴 장소로 떠나는 <대설주의보>, 세상의 많은 이별을 두려워하는 <울면서 빌었지>에서 천용성은 기억들을 붙잡음과 동시에 그 기억에 슬픔을 불어넣는다. 밝은 멜로디와 우울한 멜로디를 이어 슬픈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방식은 다른 여러 노래와 비슷할 수 있지만, 그 전환 방식이 곡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형식을 뛰어넘어 짧은 한 마디에서도 이루어지는 등 준비할 새도 없이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난 이해할 수 없었네 (feat. 곽푸른하늘)>에선 사랑은 어쩌면 초라한 것일 수 있음을, <전역을 앞두고 (feat. 도마)>에선 전역을 앞두고 든 시원섭섭한 마음을, <사기꾼>에선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를 이야기한다. 스쳐가는 잡스러운 생각을 노래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뻔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여기서 생긴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원래부터 의미가 있던 것보다 더 큰 진정성이 있다. 정리된 자기소개서나 포트폴리오를 보는 것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잘 쓰인 일기장을 보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천용성은 노래에 자신의 사소한 부분을 담아내며 또 하나의 시각을 제공한다. 그 시각은 천용성이라는 아티스트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가 나중엔 듣는 이 자신을 비추어 '내 얘기'에 대한 생각을 유도한다.
<동물원>과 <딴생각>은 구체적으로 제시된 슬픈 마음과 잡생각의 사례들을 넘어 그런 개념 내지는 상태 자체에 집중해 앨범 전체를 아우른다. 사람은 불안할 때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 불안함을 덜기 위해 고민과 아픔을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가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짐을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딴생각'이 많이 떠올라도 '동물원'이나 산책하며 혼자 견디는 게 맞겠지.
[김일성이 죽던 해]의 흥미로운 점은 포크 음악 특유의 솔직함을 담으면서도 그 전달방법에 있어 포크라는 바운더리를 넘어 더 독특한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스토리텔링 방식은 사라져 가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아낸 <나무 (feat. 비단종)>에서 가장 잘 구현된다. 포크 음악이라고 분류됐지만 블루스 장르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기타 솔로나 일렉트로닉 장르에서 사용되는 전자음을 활용하는 등 다양하고 신선한 시도가 매력적이다.
앨범을 통째로 들으면서 매일 흘러가는 생각들을 잡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의미가 생길 수도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면서 기록하고 싶은 나의 평범한 하루들을 떠올려보았다. 큰 사건은 아니지만 남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들, 예를 들면 유치원에 항상 데리러 오시던 할머니를 졸라 초코우유와 껌을 샀던 기억, 자식들 모두 성인이 된 지금도 매 크리스마스 때마다 기분이나 내라며 'Merry Christmas'라고 적은 봉투에 3만원씩 넣어 머리맡에 놓고 가시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저녁 6시만 되면 공원 계단에 서서 축구 그만하고 들어와서 밥 먹으라고 소리치셨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