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동생이 큰.일. 났다며 이야기를 쏟아 냈다. 요약하면 '관계 문제로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한참을들어 보니 힘든 일은 맞는 듯한데, 큰.일. 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 싶어 그게 왜 큰일이냐고 되물었다(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그러자 동생 왈,
1. 자기는 멘탈이 엄.청. 강한 사람인데
2. 지금 이 정도로 우울한 걸 보니
3. 객관적으로 엄.청.난. 시련이 닥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것이 큰일이 아니면 무엇이냐, 라는 논리였다. 그렇군요. 멘탈이 '원래' 강하시군요.
잠깐 고민하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럼 말이죠. 애초에 당신의 멘탈이 약한 게 아닐까요, 라고(나는 웬만하면 반말을 쓰지 않는다. 초등생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개나 고양이는 예외다).
여하튼 동생은 펄쩍 뛰며 반문했다.
―네에? 내가 멘탈이 약하다구요?
―원래 "나는 뒤끝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뒤끝이 지저분하다고 하잖아요. 멘탈도 마찬가지인거 같은데.
'뒤끝'에 대한 학계의 정설까지 끄집어 내며 몇 마디를 덧보탰지만, 반응도 시원찮아 보이고 이내 피곤해지기도 해서 관두고 말았다. 나도 멘탈이 약한지라.
자신을 멘탈 갑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아슬아슬한 마음이 든다. 마치, "나는 멘탈 을이 되고 싶습니다." 라며 힘껏 도움닫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하루에도 몇 번씩 이랬다 저랬다,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게 보통이고. 대놓고 쏘아붙이는 말은 슬기롭게 흘려 넘기다가도, 누가 지나가다 흘리는 한마디는 굳이, 애써 밟고 미끄러지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며. 결국 언젠가는 흔들리고, 귀통이도 깨지면서, 가끔씩은 금이 쫙 가버리기도 하는 것이 멘탈일 텐데.
평소에 '나는 멘탈이 강하지.' 라며 자신만만하던 분들이라면 충격 그 자체보다도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로워질 듯싶다. 일종의 대비 효과인 셈이다.
물론 세상에는 멘탈이 너무나 튼튼해서 "멘붕이요? 전 그런 거 몰라요." 하며 순수하게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단 내 주변에는 나타나 주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먼저 피해 다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분들 가까이에 있다간 되려 내 멘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어딜 가서 이런 얘기를 했더니 누군가, "저는 제가 멘탈이 약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혹시……." 라며 자신의 멘탈 레벨에 대해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글쎄.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야 (심리적) 예방 주사를 항상 맞고 있는 셈이니, 멘탈이 흔들릴 때마다 '내가 뭐 그렇지.' 라는 식으로 면역력을 발휘할 수는 있겠죠. 아마 덜 아프긴 할 겁니다. 그래도, 꽤 아프겠지만.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의 한 대목이다. 밥 굶을 일이 없는 입장으로, 전지구적인 기아 문제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저 말에 공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지옥은커녕 자신들이 사는 곳이 천국이라는 사실조차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를테면, 여자 친구를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와 같이.
다들 아시다시피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들은 결코 여자 친구를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게임이라든가, 술자리라든가, 다른 예쁜 여자…… 흠흠(그 정도는 아니겠죠). 마찬가지로 정말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면 부러 '멘탈이 어쩌구저쩌구' 떠들 이유가 없을것이다.
나의 경우 지옥……까지는 아니지만, 지리멸렬한 인생을 살아가는 1인으로서 자주 멘탈 갑을 꿈꿨다. 그리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 주변 사람들의 멘탈을 고의적으로, 때론 미필적고의로 털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집에는 이쁜 고양이가 있고, 덩치 큰 똥개도 있다. 언제든 뜨끈한 물이 나오는 정수기와 마사지 모드까지 겸비한 비데가 나의 퇴근만을 기다린다. 천국……까지는 아니지만 운이 좋다고,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큰 충격을 받았을 때 흔히들 '멘붕이다', '멘탈이 나갔다'는 표현 등을 자주 쓴다. 그와 함께 '멘탈이 털렸다'는 표현도 곧잘 사용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만은 꽤나 의미심장해 보인다. 털린다는 말은, 누가 흔든다는 뜻도 되지만 동시에 누가 훔쳐 간다는 뜻도 되니까.
자신의 재산이 털릴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문단속에 신경 써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지 않는다면 집주인으로서 직무 유기가 될지도 모른다. 애당초 훔쳐 가는 사람이 잘못이지만, 아무리 정의로운 세상이라도 도둑들이 자기 직무를 잊는 법은 없을 테니.
그런데 스스로 문을 열어 놓는 것도 모자라, 알아서 열쇠를 가져다 바치는 사람들도 세상엔 있는 것 같다.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