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가 있으면 상대가 한글을 쓴다
4. 외국어는 못해도 된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상대가 한글을 쓴다.
아버지는 말하셨다.
내가 영어도 못 하고, 일어도 못 하고, 중국어도 못 하잖아. 그런데 한중일 포럼을 맡아버린 거야. 그냥 나 보고 하래. 그때 내 나이가 50도 넘었어.
어떻게 할지 아이디어는 다 있는데 깜깜한 거야.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뭐 어떻게 되겠지 하며 시작했지.
한국이 메인이라 키를 잡은 사람이 나였어.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한글 할 줄 아는 사람이 나오는 거야. 중심에 있는 사람이 나니까 거기도 나한테 맞출 수밖에 없던 거지.
거기서 온 사람들 보니까 젊은데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해. 내가 말도 서류도 다 한글로 해도 다 알아들어.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거기서 이번 기회에 승진하고 싶어서 자기가 한글 잘 한다는 걸로 기회를 꿰찬 애들이더라. 나만큼이나 이번 포럼이 중요하니까 열심히 달려드는 거지.
외국어는 못해도 돼. 영어 아무리 잘 해도 아무 생각 없으면 그냥 꽝이야. 아이디어가 있어야 해. 그러면 길이 생겨.
아들은 들었다.
아들은 왜 아버지의 이런 경험이 더 일찍 오지 않았을까 아쉬워했다. 그는 영어 공부에 허비했던 돈과 시간이 아까웠다. 이걸 미리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면 아들은 억지로 학원 다니던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며 아이디어를 더 키웠을지도 모른다.
아들은 오십 넘어 새로운 기회 앞에서 무모하게 나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탄했다. 어떤 외국어도 못하는데, 이 일을 맡긴 사람이나, 이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논리적인 검토보다 느낌 있는 배짱의 승리로 보였다.
상대방이 한글을 준비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체 아버지의 생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없지만 이해하기 힘든 일은 그렇게 일어났다. 외국인 중에 누군가 한글로 돋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들의 커리어 욕망이 아버지 일의 키가 되었다. 능력주의는 이렇게 빛을 발했다.
일이 되려고 하면 이렇게 잘 되기도 한다. 생각과 의지의 문제였다. 하려고 하면 길이 보인다.
아들은 자기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영어를 잘해야 세계 어디나 갈 수 있고 누구든 얘기를 할 수 있다는 대의명분을 말하지만 소용없다. 할아버지가 아이디어로 영어를 극복했다는 건 아직 비밀로 하고 있다. 더 크면, 더 크면, 더 많이 크면, 그때 말해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