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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배운 일 6 : 기획은 심장이 완성한다

심장이 뛰는 기획서

by 장재형

6. 기획은 심장이 완성한다


아버지는 말하셨다.


기획서를 처음 쓸 때는 차가운 머리로 쓰지. 온갖 자료를 보고 타당성을 검토하면서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할 건지와 앞으로 어떤 효과를 볼지 쓰는 게 보통이지.


그런데 그런 기획서, 전략서, 보고서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지는지 너도 알잖아. 열심히 밤샜는데 윗사람은 쭉 넘기다가 물어봐.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그래서 돈이 돼? 이런 질문들 하잖아. 결론만 보는 거야.


게다가 쓰고 나서 다른 사람들 몇 명이나 보냐. 아마 너도 다시는 안 볼 거잖아. 그런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해.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잖아.


다 쓰고 나면 심장으로 봐야 돼. 기획의 마지막은 심장이 뛰어야 해. 머리로 아무리 읽어도 심장이 뛰지 않으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 수 없어. 심장으로 읽어. 마음으로 봐. 그때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지면, 그제야 사람들은 기획서를 보고 일할 수 있어.


기획은 심장이 완성하는 거야.


아들은 들었다.


아들도 보고서, 기획서, 전략서 이것저것 쓰는 일을 했다. 다 쓰고 나면 제대로 읽는 사람도 없고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쓴 시간에 회의를 느꼈다. 윗사람 피드백에 따라 쓴 보고서 방향에 이건 아니라고 피엠에게 3일 연속으로 말한 날도 있었다.


기획서가 심장을 뛰게 하라는 건 일본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었다. 숫자가 맞는지 확인하고 앞뒤 문맥이 맞는지 확인하느라 피곤한 아들에게 아버지의 조언은 낭만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아들은 점점 일의 주도성을 갖고 보고서의 책임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말이 실감 났다. 다 쓰고 나서 읽었을 때 어떤 자극도 느껴지지 않는 보고서는 아무 의미 없는 최최최최종쩜피피티 정도로 남았다.


아들은 점점 자기 스타일로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보고서라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숫자와 상식에 갇히지 않으려 했다. 윗사람이 아니라 전직원을 위해 쓰고, 이해하고 기억하기 쉽게 심플하게 쓰고, 당장 내일부터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쓰려고 애썼다.


아들의 커리어에서 딱 한 번 그런 전략서를 썼다. 한 페이지에 향후 3년간 해야 할 일과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는 숫자를 썼다. 그동안 쌓였던 생각들이 분수처럼 솟구쳤다가 폭포처럼 손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미래가 손에 잡힌 것 같았다. 신나게 쓰면서 경영자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과 웃으면서 썼다. 반나절 걸렸다.


다 썼을 때 이게 아버지가 말한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다른 보고서와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적어도 쓴 사람은 알았다. 이번엔 다르다는 걸. 심장이 뛰었다.


그 한 페이지는 전직원에게 공유되었다. 다음 해에 글이 현실이 되어갔다.


기획은 심장이 완성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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