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생 김미선

by 미선씨

처음 본 건 회사의 게시판에서였다. 얼마 뒤, 누군가의 추천에 홀린 듯이 주문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책, '82년생 김지영'이다.

어제 주문했는데 오늘 보니 배송이 와 있다.
애들 저녁 먹이고, 재우기 직전 짧은 시간에 책을 펼쳐 들기 시작하여,
애들 재우고 애들하고 놀면서도 계속 붙들고 있었고, 채 세 시간도 안돼서 다 읽었다.

흔하디 흔한 주인공이다. 다큐 같은 소설이다. 덤덤하지만 속상하다.
나도, 꼭 82년생 김지영 같은, 81년생 김미선이다.


우리 엄마는 나를 아주 힘겹게 낳았다. 저혈압 쇼크로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났기에,
갓난 나를 안고 퇴원할 때,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이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맙다며 일렬종대로 서서 박수를 쳐주었다고 한다.
태어나고 한 달 뒤까지도, 밤마다 배가 아파서 이틀이 멀다 하고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한다.
그런 엄마에게 아들 낳으라고 직접적인 압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엄마 아빠도 둘째를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4년 뒤, 남자아이가 태어났고, 내가 태어난 날 섭섭주를 마셨다던 아빠는 남자아이에게 유명한 철학관에서 돈 주고 지어온 이름을 선물했다..

" 누나가 양보해야지." "누나니까 좀 해줘라."


나는 자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네 살 많아서 그런 건가' '내가 여자라서 그런 건가'를 고민했던 아이였다.
그래서 언젠가 엄마가 아빠를 '지훈이 아빠'라고 불렀을 때, 발끈했다.
'내가 첫째인데, 미선이 아빠지 왜 지훈이 아빠'냐고.
그 이후로 엄마는 절대로 '지훈이 아빠'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내 기억에 나는 어릴 때부터 다림질을 하고 청소를 도왔다. 한동안 팔뚝 안쪽에 다림질하다 데인 자국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런데, 내 동생이 꽤나 컸을 때도, 내 동생은 다림질을 하지 않고 청소를 하지 않았다.
나는 또 그것에 발끈했다. 엄마는, 남녀차별 안 한다며, 왜 동생은 청소 안 시키냐고! 엄마는 두루뭉술 말했다.
"빨래 개라 시키면, 빨래만 개는 애가 있고, 빨래 개서 잘 넣어놓는 애가 있어. 그럼 누굴 시키겠니. 그래서 그런 거야."
일 잘한다는 칭찬인가. 아무튼 남녀차별은 아니라는 건가. 그렇게,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애매하게 넘어갔다.

대학 원서를 쓸 때였다.
"여자 직업으론 교사만 한 게 없다. 교대 어떠니. 아니면 약대나."
나는 또 발끈했다. 직업으로 좋은 게 아니고 '여자' 직업으로 좋은 건 또 뭐냐고!
분명히 학교에서'여자'라서 불리하다고 배운 건 없었다. 똑같이 공부했고, 오히려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더 잘했다.
그랬기에 진심으로 나는 저 말을 듣는 순간 교대를 선택지에서 지웠고, 공대에 입학했다.

공대에 들어갔지만, 나는 교양수업에 더 강한 학생이었고, 특히 여성학 수업을 관심 있게 들었다.
주변의 남녀차별, 여성 혐오 사례는 너무도 은근하게, 넓게 깔려 있어서, 신경 쓰고 보다 보면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한 사회였다.
어느 날, 신문기사에서 '여교사'로 칭하는 것에 대해서, 왜 남자 교사는 그냥 교사고, 여자 교사는 '여교사'라고 적냐며,
심지어 교사는 여자들이 대부분인데, 왜 '교사'라고 칭하면 그건 남자인 거냐고, 따지듯 이야기하니, 당시 남자 친구가 그랬다.
"너는 왜 네가 겪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신경 쓰고 화내고 그래?"

사실, 그랬다. 나는 평균적인 '82년생 김지영'보다는, 운이 좋았고, 덜 차별받고, 덜 힘들게 살아왔다.
내가 몰랐을 수도, 단지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대학 다닐 때도 성적인 면에서 얼굴 붉힐 일은 없었고,
종종 사고가 난다는 MT나 동아리는 연애로 바빠 참여한 적이 없었고,
아르바이트는 초등학교 아이들 또는 여학생들 대상으로 과외를 주로 했으니 임금을 떼먹거나 성적으로 희롱당할 일도 없었고,
취직도 운이 좋았던 건지 처음 본 면접에 한 번에 수월하게 붙었다.
입사한 회사도, 합리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대기업이라서 그런지, 군대 다녀온 남자에 대한 호봉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고,
법 제도에서 정해진 출산휴가, 육아휴직은 썩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회사였다.

그래서 한동안 눈을 감고 지냈다. 내 옆의 많은 82년생 김지영들이 아파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그걸 마음에 담지 않았다.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10여 년은, 임신, 출산, 육아의 반복이었으니까. 회사도 계속 다니면서.
하루하루 전쟁 같았다. 애가 셋이 될 때까지, 워킹'대디'인 신랑의 생활은 썩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데,
워킹'맘'인 내 생활은 임신했다가, 만삭이었다가, 애가 하나였다가, 둘이었다가, 셋이었다가, 복직했다 휴직했다,
다시 또 복직 후 휴직, 이 도우미 저 도우미, 이 어린이집 저 어린이집, 몇 달마다 상황이 180도 휙휙 바뀌었고,
나는 적응해내야만 했다.
내가 단지'여자'라서 이 어려움을 감수해야 된다는 게 억울할 법도 한데, 억울해할 시간이 없었다.
만삭인 임산부한테도 자리하나 안 비켜주는 출퇴근 버스 안의 사람들,
남편의 회식은 옵셔널 한 통보사항이고 내 회식은 한참 전에 승인받고 협조받아야 하는 사항인 것,
애가 둘이어도 셋이어도 애보고 밥하고 집안일하는 것의 책임은 온전히 내 몫인 것,
애보고 집안일하고 회사 가는 나는 일을 절반만 하니 좋겠다면서, 일만 하는 신랑의 출퇴근은 힘들겠다며 위로받는 것 등
모든 억울한 상황에 매사 날을 세웠다면, 아마도 지금 나는, 제정신으로 살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분통이 터져서 화병이 생겼던가, 무언가 박차고 나와서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변명 같지만, 일단 살아야 하니까, 애들 챙기며 먹고사는 것만 생각하면서 다른 일엔 눈감고 모른 척했던 것 같기도 하다.
부려먹기 위해선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시혜를 던져준다는데, 나도 그렇게 부림 당하고 있었던 건가 싶기도 하다.

나에겐 아이가 셋이고, 세 아이 모두 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낳는 그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이 아픔을 이 아이도 겪겠구나, 싶어서.
이 아이들은 82년생 김지영보다는 좀 더 안전한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할 텐데.
나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 애들만 잘 키운다고 될 일도 아니다. 결국,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얼마나 차별적으로 대하는지,
작은 말 한마디 소소한 행동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평범하나 설득력 있게 그려내어 이 문제로 관심을 유도한다.
책 마무리에서 꼭 내 또래인 82년생 김지영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은 채로 등장한다.
책에서라도 사이다 같은 이상적인 세계를 보고 싶었는데, 작가는 끝까지 현실을 충실히 기록한다.
속이 상한다. 작가가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책으로 후속작을 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언젠가 낼 책에서라도, 조금은 나아진, 조금은 더 행복해진 82년생 김지영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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