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by 미선씨

우리 회사에는 일 년에 하루, '여자 직원'들을 위한 행사가 있다.

여자 직원들끼리 저녁을 같이하며 이야기하고 성공한 여자 임원의 조언도 듣는 시간이다.
그날의 연사는 우리 회사 임원이 아닌, 타 계열사의 임원이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공채로 입사해서 임원이 된 여자의 케이스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 회사의 여자 임원들은 전부 타 회사에서 경력으로 스카우트된 경우들이라고 했다.
여자 직원이 30%가 넘는 회사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그 임원의 조언을 듣는 시간.
들으면 들을수록 내 속은 배배 꼬여갔다.
자기는 운이 좋아 시부모, 정확히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았고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겼고,
일은 정말로 야근과 주말근무를 불사하며 열심히 했고,
그 와중에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엔 집에도 신경을 기울였으며,
그렇게 선택과 집중을 잘 한 탓에 임원으로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쉬이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
나는 사정상 양가 부모님께 아이를 맡길 수 없다. 맡기고 싶지도 않다.
입주 시터를 쓸만한 돈도 없다.
내 수입에서 최대로 도우미를 쓸 수 있는 범위는 일주일에 4번, 반나절 가량이다.
그러니 야근과 주말근무를 불사할 상황도 되지 못한다.
퇴근은 둘째치고 아이 셋 등원시켜야 해서 아침 출근시간도 제대로 못 지킬 판인데 뭐.
아이도 셋이나 돼서, 누구 하나 신경써주기도 힘들다.
무엇보다, 나는 슈퍼우먼이 아니다!

자꾸 트집을 잡게 된다. 나는 저렇게 못하니까 임원은 못될 거야.
저 사람은 상황이 좋았네. 임원이 될 싹수가 보였네. 나는 글렀어.
나도 안다. 변명이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성공하고 싶은 욕구가 원래 없었던 건지, 없어진 건진 모르겠지만
그나마 내가 임원 되려는 욕심조차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욕심 있는 여자였다면, 회사, 가족, 시터의 눈치를 보며 아등바등 살아가느라
내 앞길 못 챙기는 것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연사의 강연은 내 속만 배배 틀어놓았다.
정작 이 행사에서 얻은 수확은, 임원의 조언이 아닌
테이블에 같이 앉은 또 다른 워킹맘들과의 대화였다.

나와 같은 워킹맘이 있구나. 많았구나.
우리는 그저 만나지 못한 것뿐이구나.
만나면 이렇게 할 말이 많은데.
그저 얘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속이 풀리는데, 위로가 되는데.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일이다.
안타까운 점은, 워킹맘들은 다들 시간 푸어라,
이렇게 시간 내서 수다 한번 떨기가 힘들다는 것.
워킹맘들이 아이 떼놓고 모여서 이야기할 시간만 있어도
워킹맘들의 행복도가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때론 일기 같은, 때론 캠페인 같은, 때론 두서없는 글을 적어 올리면서
대체 내 블로그의 목적은 무엇일까 생각하곤 했는데,
희미하게나마 목표를 찾았다.

세상의 모든 워킹맘들에게,
당신과 똑같은 평범한 워킹맘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특출난 워킹맘 말고, 평범한 워킹맘.
아이 때문에 울고 웃으며 미안해하는 엄마이자, 회사 생활에서 쪼이고 스트레스받는 회사원이면서,
출근시간에 동동거리고 시터와 업무 조율해가며 시간에 허덕거리는 그냥 워킹맘.
나도 아직 워킹맘의 길을 가는 중이지만,
내 뒤의 평범한 워킹맘들이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도록.
내 글들이 평범한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24시간 힘내고 있는 워킹맘들에게,
그리고 지금 나에게.

이미 충분히 힘든 거 알아.
너무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해.

다들 아등바등해. 견디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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