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를 사랑한다. 최선을 다해 애정을 쏟아 일하고 있다. 회사일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희생하는 부분도 많다.회사원으로 살기 위해서, 엄마인 나는 꽤나 많은 걸 기회비용으로 지불한다. 내 애들은 8개월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해야만 했고, 방학이어도 쉬는 시간 없이 학교에 가야만 하고, 고정적인 양육자가 없이 어린이집, 시터, 할머니 품을 전전해야 한다. 그래도 나는 애들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런 과정에서 아이들이 더 빨리 스스로의 일을 해내기도 하고, 24시간은 아니더라도 아침 등원과 저녁밥 먹는 것 이후부터는 엄마인 내가 전담하니까, 이만하면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큰아이가 이제 5학년이 된다. 학원도 딱 하나 다니고 방과 후 수업도 만들기 하나 들으니 아이는 아주 여유롭게 놀고 있는 중이다. 일기와 학원 숙제, 딱 그것만 챙기려고 하는데 퇴근하고 돌아와서 저녁 먹고 씻고 정리하고 나면, 아이에게 '숙제했니 안 했니' 묻는 정도가 챙김의 최선이다. (그리고 늘 대답은 '안 했어'이다)
사실 늘 그랬었는데, 갑자기 요즘, 내가 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들었다. 어릴 때는 자전거를 며칠이면 배울 수 있는데, 수영도 몇 달 배우면 하는데, 피아노에 하루 한 시간 투자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커서 배우기는 어렵지 않은가. 아이의 하루는 어른의 하루보다 몇 배의 잠재력이 있을 텐데, 그 귀한 시간을 다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의 시간을 흘려버리면서 내가 얻는 게 무엇인가 싶어서, 근무 이력을 뒤적여봤다. 오래도록 앞자리가 바뀌지 않은 연봉과 좋다고 할 수 없는 고과, 세 번의 진급 누락. 절대적으로 적다기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연봉이, 내 주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진급을 못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아프게 자존심을 건드린다. 특출 나게 잘하지 못한 거 안다. 회사에 24시간을 올인하는 사람도 많으니, 겨우 8시간 올인할 수 있는 내가 그들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기란 어려울 거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못했나 싶은 거다. 진급을 세 번이나 누락하고, 팀 내 가장 낮은 수준의 연봉을 받을 정도로 못했냐는 거다. 한다고 했고,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들었던 것 같은데. 그저 말뿐이었다. 이제야 현실을 직시한다. 나는 회사생활을 지독하게도 못한 거였다.
이건 짝사랑이다. 맞사랑이었으면 회사에서 나에게 준 성적표가 그 모양 일리가 없다. 그저 휴직을 세 번이나 해도 복직을 받아주는 게 고마워서, 믿을 만한 어린이집이 있는 회사인 게 다행스러워서, 출퇴근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게 감사해서 고과, 진급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회사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미련하게.
남편은 내 회사생활에 대해 아이들도 적당히 챙길 수 있고 월급 받을 수 있으니 진급이야 늦어도 괜찮다고 한다. 책에서는 회사 생활이 인생의 전부냐며, 진급이 뭐가 중요하냐며, 돌아보면 별거 없다며 신경 쓰지 말라 한다. 누군가는 대신 남편과 아이 셋이 있지 않냐며, 가족과 회사의 성과를 맞바꾼 거라고 여기라 한다.
나도 길게 보고 마음을 비우고 싶다. 하지만 나는 성자도 아니고, 사람이라 자존심이 있고, 상처를 받았고, 아프다. 상대방은 나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보상을 해주지도 않는데, 계속 나만 아프긴 싫다.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라면, 모질게 끝내야 한다. 아쉬워하고 미련을 가져봤자 짝사랑하는 쪽의 마음앓이만 연장될 뿐이다. 이론은 안다. 문제는 사랑이 그렇게 무 자르듯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아. 헤어지자
그만하자 마음먹으니 '그래도 이건 좋았는데' 싶은 것들이 자꾸 떠오른다. 이런 미련퉁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더 아파봐야 끊어내려나. 아니면 자존심을 포기해야 하나. 그건 너무 슬픈데. 더 많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결단을 하려나. 꼭 모 아니면 도로 결단을 해야 하는 문제인 건가. 내가 회사에 기대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오늘, 김창옥 교수의 강연을 봤다. 강의 제목은 '열정, 권태, 성숙'. 열정은 식는 법이고, 열정기가 지나면 권태기를 겪게 된다고 한다. 열정의 크기가 클수록, 권태기를 힘겹게 보낸다고 한다. 권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우울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딱 지금 내 상황이다. 어떻게 잘 넘겨서 성숙기로 갈 것인지에 대한 팁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마음앓이가 계속되진 않을 것이다. 지나갈 것이다. 그게 그나마 힘든 내 마음엔 한 줄기 희망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싶었는데, 깔끔하게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결정하고 싶었는데, 아직은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다만 두 가지는 확실해졌다. 바로 끝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사랑은 아니었다는 것, 더 큰 아픔을 겪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