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동료와 저녁 겸 반주를 한 잔 했다. 동료가 얘기한다.
내가 맥주 마시는 거 좋아하니까, 남편이 냉장고 가득 맥주를 사다 뒀거든. 요 며칠 퇴근해서 집에 가도 영 손이 안 가는 거야. 순간 우울증이 온 건가 싶더라고.
근데 오늘 아까 답답한 회의 하는데 시원한 맥주 한잔 생각이 났어.
다행히(?) 우울증은 아닌가 봐.
나도 한참 우울증에 시달렸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가만있다가 뚝뚝 눈물을 흘리거나, (무교인데) 교회나 성당이 보일 때마다 진지하게 다녀보겠다며 입교 절차를 알아보곤 했다. 행동 양상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미친 듯이 떠드는데 화내지 않을 때' 긴급조치가 필요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평소 같으면 이미 몇 번 소리 지르고도 남았을 상황인데, 마냥 멍하게만 있는 내가 스스로도 너무 이상했다. 그리고 그걸 본 신랑도 심각성을 인지했다.
가장 나답지 않은 순간, 이건 뭔가 이상하다 싶어 우울증을 의심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구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인 거고, 그녀는 맥주 한 잔을 좋아하는 사람인 거고.
회사 생활이 힘겹던 시절이 있었다. 한다고 하는데 돌아오는 건 빨간펜이 죽죽 그어진 부정적 피드백뿐이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서 보고를 해도 바로 위 상사에 막혀서 도통 일이 진행되지는 않고, 믿었던 선배와 동료의 거짓말에 뒤통수를 맞고 고객사에 능력 없는 담당자로 찍혀버리고, 서열에 밀려서 원치도 않은 곳에 발령이 나고...... 그런 일들을 하나씩 겪으면서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구나 생각했다. 이번 일로 이렇게 마음앓이를 했으니, 다음번엔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단단해지고 있다며 좋게 해석할 일이 아니라, 회사 생활의 부정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는 거고, 이게 지속되면 나 스스로에겐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그라미 모양의 사람인데, 회사 생활하면서 네모가 되고 있는 것 같달까. 회사생활에 적응이란 걸 해버리면, 역치가 점점 더 높아져서, 어지간한 일에는 부당한 줄도 모르는 회색빛 회사원이 되어버릴 것 같아 무서워졌다.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러려니 하며 버틸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탈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제야 행동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우울증인가 싶을 때는 용기 내어 상담센터와 병원을 찾았고, 회사생활에 적응하면 안 되겠다 싶은 순간에는, 며칠 동안 혼자 산에 가서 며칠 동안 머리를 비웠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거나 뛰쳐나오거나 집을 나가버리는, 대단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시 나로서는 굉장한 용기를 낸 거였다. 내 고민을 누구한테 얘기해봤자, 남들은 이렇게 치부할 것 같았기에.
엄마들 삶이 그렇지, 회사 생활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다들 견디고 살고 있는 거야, 왜 너만 유난해
돌이켜보면, 잘 한 선택이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그런 브레이크 타임이 절실히 필요했다.
당시에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며 버티다가 우울증 약을 먹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었고, 늘 힘들고 날이 서 있었는데, 삶이 좀 더 편안해졌다.
회사생활에 진저리를 내며 며칠간 산에 다녀온 후엔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회사와 동료에 대해 기대치가 높았던 것은 내려놓고 그래도 지켜야 할 것은 지키자고 다짐하며, 동그라미는 아니지만 적어도 완벽한 네모는 아닌 나다운 회사원 모습을 정의했고, 중심을 잡아가며 15년째 회사생활을 해내고 있다.
수험생활에 매여있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빼싹 마르고 뾰족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엄마가 몸에 좋다는 건 다 챙겨줬지만 딱히 나아지진 않았다. 엄마는 어느 날, 한약이라도 먹여야겠다며 한의사한테 날 데려갔다. 한의사는 맥을 집더니 한마디 했다.
너, 힘들었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당연히 힘들었을 텐데, 나는 어이없게도 내가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고, 고3이라면 다 그런 거려니 하고, 그저 버티고 있었다. 마음이 힘들다고 소리치고 있었는데 애써 외면하고 있던 걸 한의사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달까. 마음이 힘드니 어떤 좋은 걸 먹어도 효과가 없었던 것이리라.
힘들 때일수록, 뭔가 느낌이 이상할 때일수록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여러 경험으로 느끼고 나서,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본다. 곰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한쪽으로 끌리는 게 느껴지는데, 그렇게 한 결정은 후회가 적다. 때로 외면하고 싶은 일이 종종 있는데, 사실 이것도 마음이 꺼려하는 부분이라 곱씹어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이다. 생각에서 지워도 자꾸 다시 떠오른다면, 마음이 힘들다고 외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땐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
잘 알고 잘하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정작 나도 요즘 고민 중인 일이 있다. 신경은 무지하게 쓰이는데 마음을 들여다 보기조차 왠지 좀 꺼려져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라 더 고민하기 싫은 것 같다.
힘들어도, 어쩌겠는가. 정답은 마음속에 있을 테니. 피하지 말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만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