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 두 문장은 같은 사람이 말한 것이고, '부장님'과 '형'도 동일한 사람이다. 가만 살펴본 결과, 화자는 한참 부장님 부장님 하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얘기가 좀 깊어지면, '형님'이라고 호칭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나는 마음이 꼬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왜 형님이지? 도대체 왜 내 앞에서 저렇게 얘기하는 거지?
기분이 나쁜 이유를 안다. 나는 그들과 같이 일을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형님 아우 할 만큼, 틈만 나면 같이 담배 피우러 다닐 만큼 친하지는 않다. 나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사석이면 모를까 회사 안에서는 회사 내 호칭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형'이라고 망설임 없이 얘기하는 걸 보면 그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같이 업무얘기 하는 도중에 둘만 친한 사이라며 형님 아우 하니까 기분이 나쁜데, 그렇다고 내가 사적으로 친해지기 위해서 안 피는 담배를 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 기분이 나쁘다. 나는 해보려 해도 할 수 없는 일을 내 앞에서 언급하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나만의 생각인가 싶었는데, 주변 사람들도 담배 피울 때 둘만이 공유한 걸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서 왜 형님이라며 얘기하는 건지 의도를 모르겠다고 한다. 그런 얘기는 다른 사람들의 소외감만 불러올 텐데, 그건 그 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 텐데,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던 소외된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친근한 대화를 만들기로 했다.
언니, 우리 저번에 파우더룸에서 이야기한 거 있잖아요.
그러고 보면, '호칭'에는 참 많은 게 담겨있다. '부장님'과 '형님'사이엔 꽤나 온도차가 있지 않은가. 우리 회사에서는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만들겠다고 최근 '매니저'로 호칭을 바꿨다. 그러니까 사실 회사 내에서 정확한 호칭은 '부장님'도 아니고 '매니저'여야 한다.
내 직급은 제대로 진급을 했다면 차장이지만, 진급을 못했으니 과장이다. 직급이야 어찌 됐든, 나를 부를 때는 '최 매니저'여야 하는데, 굳이 '최 과장'이라고 부르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또 배알이 꼴린다. 내가 누락한 거 알 텐데, 굳이 티 나게 '(차장 진급 못한) 과장'이라고 콕 집어서 불러야 하냔 말이다. '과장'이 맞긴 하니까 할 말은 없지만, 회사에서도 '매니저'라고 부르라는데, 굳이 왜 그러는 거지? '과장'이라고 불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저 사람이 나를 낮춰 부르려는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걸까? 단지 오래도록 입에 붙은 말이라 습관처럼 별 의미 없이 그런 걸까? 저렇게 불러놓고 내가 친절하게 대해주길 바라는 걸까?
28살 겨울, 나는 만삭이었고, 부른 배를 안고 번화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엔 로드샵이 많았고, 여기저기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님~ 오늘 최대 50프로 할인 행사하고 있어요. 어머님! 여기 샘플도 드려요~!"
하도 귀에 와서 박히길래 돌아보니, 종업원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구경하시고 가세요. "
정확히 기억한다. 그게 내 인생 처음으로 들은 '어머님'이라는 호칭이었다. 그 종업원은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나더러 '어머님'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아닌데, 아직 애를 낳지도 않았고 키워본 것도 아닌데, 그저 임신 막달일 뿐인데,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때도 생각했다. 누가 봐도 이제 나는 그저 애엄마일 뿐인가? 나를 '어머님'이라고 불러서 저 사람이 얻을 게 뭐지. 나는 이미 기분이 상했는데. 이십 대 임부인 나를 '어머님'이라고 호칭해 놓고, 내가 물건을 구매하길 바란 건가? 내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뭐라고 불렀으려나?
내 기분과 별개로, 사실상 그 날 이후 내가 듣는 호칭 중 절반 이상이 '어머니'가 되었다. 산부인과에서도, 어린이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하나 어머니~"는 그래도 괜찮다. 나는 하나 엄마가 맞으니까.
근데 앞 뒤 다 빼고 '어머니~'라고 부르면 거슬린다. 나는 그들의 '어머니'가 아니니까.
나는 이 사회에서 '어머니'로만 기능하는 건가. 진정 '어머니'외에 다른 호칭은 없는 건가. '아줌마'보다는 나은 것 같으니 그나마 고맙게 받아들여야 하나. 많이 듣는 호칭이지만, 들을 때마다 별별 생각이 든다.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신랑에게 신신당부했던 것은, 나중에 아이가 생기더라도 절대로 나를 'OO엄마'로는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OO엄마'로만 요약되는 건 싫었다. 내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건 나아가 회사를 꿋꿋이 다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적어도 회사에선 OO엄마가 아닌 내 이름으로 불리니까.
그래서 남편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이름으로 호칭한다. 다른 사람들도 맞는 호칭으로 나를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일일이 지적할 수도 없고 어쩐다지.
미국처럼 누가 됐든 이름을 부르면 간단할 테지만 여긴 한국이니까 상대방을 이름이 아닌 무언가로 호칭해야만 한다. 인사 잘하면 인상이 좋아지듯, 상대방을 잘 호칭해서 손해 볼 건 없다. 기왕지사 할 거라면 듣는 사람 입장 고려해서 호칭을 해주었음 한다.
너무 어렵다고? 그저 이렇게 불러주면 된다. '어머님~' 아니고, '최과장' 아니고, 그저 미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