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하다, 다둥이네 둘째

by 미선씨

둘째는 인라인스케이트 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는 썩 관심이 없고, 막내는 아직 혼자 탈 실력이 안되다 보니 우리 집 인라인스케이트는 거진 둘째 차지다. 우리 집 물건 대부분이 그렇듯, 그 인라인 스케이트는 첫째가 쓰던 걸 물려받은 거다. 보호구도 낡고 바숨 바숨 하고, 가방도 옆구리가 터져서 박스테이프로 대충 붙여놓았다.

어느 날부턴가 둘째가 줄기차게 인라인 가방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박스테이프로 붙여놓은 건 너무하다는 거다. 그러면서 말하길,

" 일단! 중고 아니고, 디자인은 내가 골랐으면 좋겠어."

늘 언니 것을 물려받지만 그다지 까탈을 부리지 않았었는데, 굳이 '중고'는 안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려서, 까짓 인라인 스케이트용 가방 사주자며 그날 밤 바로 아이와 함께 고른 가방을 주문했다.


(좌)테이프 붙여 쓰던 예전가방, (우) 세상에서 가장 좋은 새 가방

바로 그 가방이 배송 왔다.

두나야, 가방 왔네. 네가 열어볼래?
아 이거야? 와 블랙이 역시 예쁘네. 하늘색 하고 핑크색이 있었는데 이걸 골랐거든. 아 이거 옆에를 열어서 스케이트를 딱 거는 거구나! 여기(윗 지퍼)도 열 수 있고. 오 수납하는 데가 많아! 너무 예쁘다 엄마. 나 이거 오늘 껴안고 잘 거야. 이거 중고도 아니고 새 거잖아. 엄마! 너무 좋아

그냥 예의상 하는 감탄사려니 하고 대충 들어 넘기려고 했는데 세상에나, 좋아해도 이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아이가 이렇게 환하게 좋아하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싶은 정도로. 그래 봐야 배송비 포함 13,300원짜리 가방인데, 이 가방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아이는 자기 앞으로 할당된 '새로운 가방'의 좋은 점을 끊임없이 나열한다.


아이가 셋.

평소 아이가 셋인 거에 대해 아이들한테 미안해하지는 않는다. 물론 옷, 신발 등 대부분의 물건을 물려받아 쓰긴 하지만, 맛있는 게 조금밖에 없을 때 서로 많이 먹겠다고 투닥거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식주를 해결 못해 걱정하며 살지는 않으니까, 약간의 '결핍'을 경험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여기고 살았다.

근데 가끔, 아주 이렇게 가끔, 아이를 보면 급 미안하면서 짠할 때가 있다. 짜장면과 탕수육이 같이 있을 때 짜장면은 건들지도 않고 탕수육부터 막 덜어갈 때, 놀러 가자며 벌레 나오고 시설이 노후된 휴양림에서 숙박을 하는데도 '너무 좋다'라고 마냥 기뻐하는 걸 볼 때, 단지 중고가 아닌 새 거라는 이유로 가방 하나에 이렇게 기뻐할 때, 마음이 짠해진다.

절대로 먹을 게 부족하다거나, 못 먹이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식재료는 박스단위로 구매하고 넉넉하게 먹이는데도, '나만의 먹거리'가 아니다 보니 경쟁적으로 차지하려고 한다. 호텔도 가려면 갈 수 있지만 굳이 휴양림을 가는 이유는 가성비도 고려했지만(5인 가족이다 보니 호텔은 방 2개를 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가 숲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아이들의 눈높이가 휴양림 기준으로 맞춰진 것 같아서 좀 미안하다.




어제 동료랑 야근을 하다가 같이 야식 같은 저녁을 먹었다. 최근 우리 부서로 온 친구인데, 발령받아 오자마자 일에 시달리며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서 특성상 사실 이 친구뿐 아니라 우리 부서 사람들 대부분이 일이 많아 야근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태긴 하다. 이 친구가 말한다.

"일도 비수기가 있고 성수기가 있는 거죠? 지금이 성수기인 거죠? 다들 너무 바쁘세요. 짠해요."


아, 누군가가 보기에 나도 짠하구나.

사실 최근 일주일은 거의 매일 12시간 가까이 근무했다. 그래, 짠해 보일 수도 있겠다. 스스로 내가 짠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에, 이 친구의 말을 듣기 전까진 몰랐다. 바쁘긴 해도 해야 할 일이고 뭔가 이뤄내고 있다는 생각에 억울하진 않았는데, 좀 너무했던 건가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짠하게 여기면 아이들도 스스로 짠하게 여기지 않을까.

나부터 진심으로 믿어야겠다. 호텔은 못 가는 거 아니고 안 가는 거라고, 새 거 살 수 있지만 안 사는 거라고. 절반은 자기 최면이지만, 절반쯤은 사실이니까. 너무 나 혼자만의 정신승리 같을 때는 진짜 보상도 주면 되지 않겠나. 계속 눈에 아른거리는 건 사면되고, 몇 년에 한 번은 호텔도 가면 되지.


무엇보다 가끔 너무 짠하고 미안하더라도, 아이들에게 티는 내지 말아야겠다. 하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부장님'과 '형님' 사이, 호칭에 숨은 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