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을 만드는 시기

by 미선씨

얼마 전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정 연도에 가장 HIT 한 가요의 제목과 가수를 맞추는 게임이 나왔다. 1990년~2000년 정도의 가요는 같이 고민하며 맞추는 재미가 있었는데, 1980년도나 2010년 이후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길래 영 재미가 없어서 좀 보다가 시청을 접었다.


돌아보면 1980년대의 나는 너무 어렸고, 2010년 이후 나는 아이를 키우느라 가요 들을 새가 없었다. 결국 내 기억에 남은 가요들이란, 10대와 20대 초반에 들었던 곡들이다. 고민 많던 중학생 때, 감성 넘치던 고등학생 때, 노느라 바빴던 대학생 때 들었던 음악들. 만일 내 안에 음악 나이테가 있다면, 10대와 20대 때 왕성하게 커졌다가, 30대에는 거의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요즘 가끔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중학생 때 참 열심히 듣고 그 이후로 듣지 않았었는데, 마흔이 되어 이제 다시 듣는다. 물론 이제는 주파수 맞추지 않고 유튜브로 듣는다. 내가 듣는 방송은 40대의 악보 제작자가 운영하는 '철 지난 발라드를 피아노로 연주해주는 방송'이다. 특별한 코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예인 BJ도 아니고,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도 아니라서, 굳이 챙겨 듣기엔 좀 어려운 방송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듣고 있다. 엄마가 틈만 나면 방송을 틀어놓으니 이젠 아이들도 로고송을 흥얼거린다. 어느 날 큰애가 물었다.

엄마, 엄마는 저게 재미있어?


아이의 눈에는 잔잔하기만 하고, 안 그래도 모르는 노래를 그나마도 더 잔잔하게 피아노로 연주해주는 게 무슨 재미인가 싶었나 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 마치, 내가 최근 음악방송이나 런닝맨 게임을 볼 때의 기분처럼. 아이는 의아했겠지만, 나는 그 잔잔한 피아노 연주의 감성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럼, 이 노래들은 엄마가 너만 할 때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노래거든.
엄마 말고도 지금 듣는 사람들 많은데,
다 이때 이 노래에 추억이 있는 사람들 아니겠니.
그니까 하나야, 네가 지금 좋아하고 듣는 노래들이 평생 남는 거야.

아이도 내가 얼마나 이 방송과 이 모임을 좋아하는지 아니까, 조금은 알아들었길 기대한다. 십 대 초반, 그 시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 전에, 두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넷플릭스에서 추천하는 하이틴 로맨틱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봤다. 1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봐서, 2편도 챙겨봤다. 그러고 보니, 로맨틱물을 좋아하는 것도 10대 때 생긴 취향이다.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1989)',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가 내 최애 영화니깐. 여하튼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 매력 있는 여주 라라 진은 꽤나 멋진 남주 피터에게 밸런타인 선물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자작시 한 편.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니었을 테지만, 책을 좋아하는 라라 진은 감동을 받았고, 한 구절 한 구절 자기 이름이 들어간 그 시를 외워버린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피터가 쓴 게 아니고 유명 작가의 시를 그저 베꼈다는 걸. (다른 얘기하자면, 라라 진이 실망한 그 장면에서 나는, '자작시는 못 써도 마음씀이 깊고 키도 훤칠한 저 남자를 사랑하겠어!'라고 외쳤다. 하하.)



내가 인상 깊었던 건, 라라 진에게 언해주는 할머니의 대사였다.

에드가 엘런 포. 남자 친구의 취향이 좋은 건 인정해야겠구나.
내 아이가 취향이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어느 시가 좋은지를 알려면 많은 시를 깊이 있게 봐야 하지 않겠나. 어떤 노래를 좋아하려면 계속 들어야 한다. 어떤 미술작품이 내 취향인지 알려면 많이 봐야 한다. 관심사에 집중할 수 있는 10대 내지 20대에 취향에 대한 탐험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에는 욕심이 없는 편인데, '경험'을 하게 하는 것에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음악을 깔아놓으려 하고, 없는 시간 쪼개어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부모부터 책 보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힘들어서 한두 번 시도해보고 접었다가, 생각나면 다시 한두 번 시도해보는 수준이다. 욕심만 있다고 될 일은 아니고, 시간과 정성과 열정을 들여야 하는 일인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나에게 그만한 리소스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쩌다 한 두 번 공연을 보러 간다고 관심 없어하던 아이가 급 관심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백건우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완곡 연주에 큰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아이는 꿀잠을 자고 왔던 슬픈 기억이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목표를 조정했다.

엄마의 취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

엄마가 듣는 낮사람의 방송을 오며 가며 듣는다던가, 엄마가 보는 책을 옆에서 슬쩍 들여다본다던가, 엄마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어쩔 수 없이 듣는다던가. 부족해 보여도 우리 집 상황을 고려할 땐, 이게 최선이다.

엄마의 취향이 아이의 마음에도 든다면 엄마가 좋은 것들을 소개해줄 수도 있을 것이고, 취향이 다르더라도 문화생활은 평생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엄마를 보며 체득하길 기대한다.


낮사람 방송 들으며 글 쓰는 어느 날 아침. by 미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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