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by 미선씨

현재시각 토요일 오후 다섯 시,

남편과 아이들이 잠깐 자전거 타고 오겠다며 집을 나간다. 큰애가 엄마도 같이 나가자고 성화였지만, 아침부터 여기저기 볼 일이 많았어서 이미 지친터라, 극구 엄마는 쉬어야겠다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자유시간이다!



땡볕에서 좀 걸었더니 너무 피곤해서 씻고 나온 참이었다. 누워서 한잠 자면 딱 좋겠는데, 침대에는 막내가 가지고 놀던 자자분한 인형들이 지뢰처럼 깔려있다. 저것들을 치우고 눕느니 눕지 않는 게 더 나을 것도 같다.


출출해서 주방을 보니, 아침으로 먹다 남은 빵과 콘프레이크 조각, 컵과 물병, 점심 반찬, 먹다 흘린 흔적들이 식탁위에, 싱크대위에, 주방 바닥에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설거지할 거 정리하고 식탁도 닦고 싶은데, 그러다간 모처럼의 자유시간이 집안일로 끝나버릴 것 같아 꾹 눌러 참기로 한다.


주방 한 켠을 보니 세탁기에 빨랫감이 산처럼 쌓여있다. 분명 어제 빨래를 했는데, 언제 또 이렇게 쌓였담. 아무리 세탁기를 돌려도 시커먼 것들을 모아다 싹 삶고 싶은데, 그랬다간 또 그거만 하다 시간이 가버리겠지 싶어 애써 고개를 돌린다.


기왕 낮잠을 자지 않을 거면 건설적인 것을 하고 싶어서 엊그제 보던 책을 찾았다. 내 화장대와 내 피아노인데, 애들 장난감과 애들이 만들어 준 아이들 공작품들이 정신사납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 이렇게 정신없는데 책이 눈에 들어오긴 할까 싶어서 마음을 접는다.


옆을 보니 분리수거 쓰레기가 고개를 내민다. 아, 분리수거하는 날이지. 일주일간 쌓아놨던 쓰레기 버리긴 해야 하는데, 후딱 치워버리고 싶기도 하고, 기껏 씻고 나왔는데 쓰레기 버리고 싶진 않기도 하고. 저울질하다 내일 버리기로 한다.


드디어 다른 건설적인 일을 생각해냈다. 바로 글쓰기!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마음을 잡고 보니 내 노트북이 없다. 아이들이 또 유튜브본다고 가지고 갔나보다. 노트북 찾으러 아이들 방에 들여다보니 가관이다. 대충 벗어놓은 옷, 언제 버린건지 모를 사탕껍질, 널부러진 책과 장난감... 대충 분류라도 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정말 애써서 참는다. 나는 지금 건설적인 일을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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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하던 휴가를 갔는데, 계속 업무 전화가 오는 느낌이 이런 걸까. 휴가를 마음껏 즐기기엔 너무나 찝찝한 주변 환경이다. 휴가래봐야 꼴랑 두시간 정도일텐데, 고민하다가 삼십 분을 날려먹었다. 사실 억지로 글 쓰는 지금 내 눈앞도 너무 어지러워서 도통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노트북 옆에 널려있는 컵과 반찬이 왜이렇게 거슬리는 건지.


같은 공간에서 업무와 휴식을 명확하게 구분하는게 너무 어렵다는 걸 실감하는 중이다. 오늘은 그나마 확실히 휴식'시간'이었지만, 평소에는 집안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더 어렵다. 아마 나 뿐 아니라 가족 다섯 명 다 그럴거다. 혼자 쉬고 싶을 때가 있고, 가족과 함께 있고 싶을 때가 있고, 공부나 업무를 해야 해서 방해받지 않고 싶을 때도 있을텐데, 식구가 많고 집이 좁아서 공간을 분리해 줄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쨌든 나는 이 정신 사나운 집에서 글을 한 편 써냈다. 많은 갈등 끝에 마음을 다잡고 시간을 잘 활용해서, 나에게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해 낸거다. 눈에 밟히는 집안일을 안 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엄청난 기회비용을 들인 결과물이 이 글이다.


절대로 집안일을 하기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변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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