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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Jul 14. 2020

실행력이 부족한 기획자

회사라는 델 15년 넘게 다니고 있는데도, 일을 대할 때마다 고민이 많은 편이다. 나 혼자 하면 되는 일의 경우엔 외려 간단하다. 내 역할에 맞으면 고민 없이 하면 되고 내 역할이 아닌데도 일이 주어진 경우엔 주변 사정을 고려하여 방안을 정한다. 상사에게 여기서 할 일이 아니지만 하는 거라고 어필하고 진행할지, 어째서 할 수 없다고 상사를 설득할지.

다만 협업을 해야 하는 경우, 좀 복잡해진다. 이 일이 왜 문제가 되는가부터 엮여있는 여러 팀의 이해관계, 실무자급에서 되는 일인지 팀장급까지 협의되어야 하는 일인지에 대한 판단,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고려사항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등 고려할 게 많다.


회사에서 내 역할은 '기획자'다. 일을 어떻게 할지 기획하고 계획하며, 진행하는 일에 이슈가 생겼을 경우 논리를 마련하거나 상대방을 설득해가며 문제를 해결한다. 오래 하고 있는 일인데도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 주요한 이유는 2가지다. 유관부서가 동일한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기보다는 정치논리에 의해 제각각의 입장이 갈릴 경우가 많아서가 첫 번째고, '기획'자이다 보니 직접 '실행'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니 논외로 치고, 두 번째 '실행력'이 없는 '기획자'의 존재 의미가 얼마나 될까라는 회의감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집에서의 내 주요 역할도 '기획자'이다. 오늘 아침 뭘 먹을지, 그래서 장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볼지, 아이들 학원은 어디로 보내며 스케줄은 어떻게 조정할지, 주말 일정은 어떻게 할지, 놀러 간다면 어디로 가서 무얼 할지, 집안 대소사는 어느 정도로 어떻게 챙길지, 매일매일 터져 나오는 소소한 이슈들-예컨대 아이가 갑자기 팔이 아프다는데 병원에 가야 할지 말아야지, 간다면 언제 누구랑 어느 병원을 갈지- 에 어떻게 대처할지 정하는 건 거의 다 내 몫이다. 몇 년 전 글을 보니, 당시 나는 이런 소소하다면 소소한 챙길 거리가 끊임없이 쌓여가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이슈가 터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기는 한다. 예컨대 갑작스레 담임선생님한테 전화가 온다던가, 아이들끼리 산책을 나갔다가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연락받았을 때, 아이가 간지럽다고 긁어대피부가 찢어진 걸 발견했을 때. 예상외의 일에 대해서 놀라고 당황하는 건 사실이지만, 십 년 넘은 육아 짬바사안의 크기에 비해서는 침착하게 대처하는 편이다. 일상적인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당연히 예전에 비해 훨씬 능숙하게 처리하고 있고. (객관성은 없는 나 스스로의 판단이긴 하지만, 성장했다고 느낀다.)


다만 요즘 고민은 '실행력'이다. 매일 저녁 퇴근하고 돌아와 아이들 한 명씩 붙들고 오늘 어떻게 보냈는지 대화 한마디 하는 거, 학교도 안 가는 아이들 학업 진도 체크하는 걸 하고 싶은데, 도무지 체력이 달려서 할 수가 없다. 집에 오면 저녁 차려먹고 치우고 바로 잠들기 일쑤다 보니, 대화 한 마디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날이 많다. 오죽하면 어떤 날은 둘째가 침대에 붙어있는 나를 찾아와서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가는 게 그나마 둘째와 하는 그 날의 한마디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실행력이 모자란 기획자'이다. 만들고 싶은 솔루션이 있어도 직접 개발은 못하고, 아이들과 하고 싶은 게 많아도 체력이 달려서 못한다. 협업자를 잘 설득하거나 아웃소싱을 하는 것, 즉 실행할 사람을 구하는 것도 기획자가 해야 할 일이라길래 노력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다. 설득과 아웃소싱도 열정과 노력이 필요한, 공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깜냥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은 걸 쥐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애초에 혼자서 다 할 수도 없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고 해도 벅찬 양의 일을 어떻게든 내 선에서 해보려고 낑낑대고 는 것 같다. 간혹, 그 와중에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무서워진다.


 

나이 지긋한 회사 선배와 아이들의 돌봄 공백에 대해서 얘기하던 중이었다.

"코로나 이후로 애들이 일주일에 한 번밖에 학교에 안가요. 학원 딱 하나 가는데, 학원이며 학교에서 수시로 준비물이며 숙제 챙기라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수업도 못따라가고 있다는데, 바빠도 붙들고 해야 되겠죠? "

"아이 아토피가 심해져서 스테로이드 쓰고 있는데, 그나마도 매일 챙겨서 못 발라주니까 더 악화되더라고요. 친정부모님이 한방을 쓰자고 한약받아오셨는데, 오히려 더 돋아나서 지금 아이 팔하고 다리 상태가 엉망이에요."


하소연하는 나에게 선배가 말한다.

" 우리 애들이야 뭐 이제 대학생 되고 했는데, 더 챙겼다 해도 결국 아이가 받아들이는 건 같았을거 같기도 하고,
어릴 때 좀 더 봐줬으면 더 잘됐을텐데 싶은 후회가 들기도 해.

건강도 그래. 우리 애도 아토피가 심했거든. 어릴 때보다야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철마다 약은 발라야 해. 어릴 때 좀 더 신경썼으면 달라졌을까 싶더라구. "


워킹맘에게 회사생활과 엄마노릇의 밸런스를 챙긴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기획해봐야 실행할 수 없는 것들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해야 할 일 자체를 줄여야 하는 건 아닐까. 지금, 최선을 다 해도 못하는 것들이 보이는데, 그렇다면 뭘 줄여야 할까.


어떤 선택에도 후회가 남을 거라면, 나중에 덜 후회하는 선택이 뭘까.

과연, 나중에 나는 후배에게 어떤 말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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