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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Jul 17. 2020

열심히 했는데 칭찬을 못 받았어

고과 면담 날이다.

아니나 다를까, 길고 긴 얘기의 요점은 좋지 않은 고과.

근거는, 열심히 잘했지만 어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심일지 어떻게든 말을 하려다 보니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그렇다고 한다.


내가 봐도, 나는 낯 뜨거워 내 성과가 이렇다고 잘 어필하지 못하는 편이긴 하다. 일의 결과가 아닌 어필의 결과로 평가를 하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게 현실이라고 한다. 느끼고만 있던 게 현실로 다가오니 기운이 쭉 빠진다.



집에 돌아오니 막내가 해맑게 엄마를 반겨준다. 저 멀리서 달려와 인사하고 안아달라 하고 재잘거리고 춤도 추는 아이를 보면서, 겨우 입꼬리를 올려본다. 아이는 찰싹 붙어서 얘기하자 책 읽어달라 하는데,  자꾸 회사 생각이 밀려들어와 집중을 못하고 기분이 우울해진다. 기왕 이런 거 차라리 아이와 대화를 해볼까 싶어 아이에게 물었다.


" 세나야, 엄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 왜? 엄마 무슨 일 있어?"

" 엄마가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아무도 칭찬을 안 해줘. 어떻게 해야 해?"


무슨 말을 하려나 기대하고 막내를 쳐다보고 있는데, 세나가 말한다.



"음... 엄마가 이 책 읽어주면 대답해줄게."

헐, 밀당을... 한다. 

와 아이가 이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알았다며 제법 글밥 많은 책을 다 읽어주었다.


드디어 마지막 장. 꽤 긴 책이어서 까먹었을 줄 알았더니, 세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책 다 읽었으니까 얘기해줄게."

 

칭찬을 안 해주면, 칭찬을 해달라고 말해야지!"


(엇, 내가 못하는 포인트를 콕 짚었다)


" 그게, 엄마는 그렇게 얘기하기가 좀 부끄럽더라."

" 그래? 그러면, 부끄러우니까 마스크 쓰고 가서 말해. 모자도 쓰고 안경도 쓰고."


심플한데 그럴듯하다. 어쨌든 얘기를 해야 한다는 건데... 한 번 더 물어보았다.

" 세나야, 근데 엄마가 다시 생각해봤는데, 안경 쓰고 모자 쓰고 해도 어려울 거 같아. 어떡하지?"


"흠... 아! 그렇겠네. 
모자랑 안경까지 쓰면 안 보여서 엄마인 줄 모를 거 아냐.
그러니까 안경은 벗어야겠네."



동문서답이지만, 맞는 말이다. '내'가 했다고 '내'가 어필해야 한다는 것.

사람 성격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어필하도록 노력을 해보던가, 정 못하겠음 기대를 놔야 하는 거 같은데 둘 다 어렵다. 그냥,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회사생활에서 떨어져 있을까 싶기도 하다.




다음날, 퇴근해서 둘째 밥 차려주고 나는 맥주를 꺼내 들었다. 어제 남편이 사다 놓은 자몽맥주다. 언젠가 먹고 싶다고 얘기해두었었는데, 기억하고 사다 주었다. 밥보다 맥주 한 캔 하고 싶은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마침 챙겨준 맥주도 있고 하니, 아껴뒀던 하몽도 한 줄 꺼내본다.


한 캔 하고 있는데, 열두 살 첫째가 학원 끝나고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인사하고 쓱 둘러보더니, 한 마디 한다.

"엄마, 오늘 힘들었어?"


보자마자 하는 말이 왠지 웃겨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첫째가 대답한다.

" 엄마 힘들 때 맥주 먹잖아. 하몽도 있길래. "



무엇 하나 상황이 달라진 건 없는데, 기분이 나아졌다. 심플해서 지혜로운 막내, 별로 차려준 것 없는데도 맛있게 먹어준 둘째, 시크하게 엄마 기분 알아주는 첫째, 은근슬쩍 챙겨주는 남편 덕분이다.

고마운 사람들.

그래, 가족이 우선이다.

어떤 결정을 하던, 우선순위는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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