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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Aug 05. 2020

엄마가 좋아하는 건 뭐야?

잠자리에 들기 직전, 막내가 종알댄다.

"엄마, 나는 엄마가 제일 좋고, 그다음이 언니들, 그리고 아빠, 할머니 이 순서로 좋아. 엄마가 좋아하는 건 뭐야? 순서대로 얘기해줘. 일부터 십까지"


명쾌한 질문인데 대답하기가 어렵다. 좋아하는 것도 잘 안 떠오르는데, 순위대로 얘기해달라니 더 난감하다. 겨우겨우 대답을 이어 나가본다.

"음, 엄마는 가족이 첫 번째로 좋고, 여행 가는 거랑, 피아노 치는 것도 좋고... 음... 맛있는 거 먹는 것도 좋아."


막내가 말한다.

"엄마 쉬는 거랑 자는 것도 좋아하잖아! 나도 나도, 맛있는 거 좋아. 엄마 순서대로 똑같이 좋아하는 거 할래. "




날이 갈수록 세상사에 명확한 게 없어진다. 어릴 때엔 명확하게 말할 수 있던 것들도 이제는 머뭇거리게 된다. 한참 소설 태백산맥을 읽던 시절, 흑 아니면 백이 맞고, 회색분자는 나쁘다고 생각한다라고 아빠에게 말씀드리니, 당시 아빠가 그러셨다.

" 모든 걸 흑 아니면 백으로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야. 오히려 세상은 회색에 가까워. "


당시엔 갸우뚱했던 아빠의 대답이었다. 수십 년 지난 지금은 그래도 좀 알 것 같다. 내가 인생에서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 포인트는 '육아'였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미혼의 내가 무심코 했던 말들이 너무 미안해진다.

" 어후, 저 집은 한여름에 애한테 부츠를 신겨서 나오냐 세상에. "

" 아니 애가 우는걸 왜 달래질 못해? 부모면 아이를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매정하게 쏘아붙였을까. 겪어보고 나서야 알겠다. 아이란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미혼의 나는 이런 다짐도 공공연히 했었던 것 같다.

" 아이는 수면교육시켜야 한다던데, 백일만 고생하면 된다는데, 그걸 왜 못하고 계속 아이를 데리고 자면서 힘들다고 하는 거야? 나는 딴 건 몰라도 수면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킬 거야."

" 우리 애가 편식하면 억지로 밥 안 먹여. 그냥 굶겨서 버릇 잡을 거야."

다들 어려워하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을,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 난 태어나서 한 번도 늦어본 적이 없어. 내가 딴 건 몰라도 지각은 절대로 안 해. "

" 우리 애는 유기농만 먹어. 시중에서 파는 먹거리는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난 무조건 직접 만들어 먹여. "


반작용일까. 이런 말을 들으면 의심부터 올라온다. 본인이 하는 걸 넘어서 강요하는 느낌이 들어서 싫기도 하고. 상대방이 대놓고 비난한 건 아니라지만 왠지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것들을 해본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움츠러들게 된다.   


어쩌면, 단호한 말투를 구사하던 엄마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굉장히 강조하면서 말씀하시는 편인데, 늘 좀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 엄만 평생 뭘 해본 적이 없어.

" 이 옷 너무 예쁘지 않니. 면이야. 여기저기 구멍 난 게 예쁘잖아. 근데 왜 안입는다는거니. 네가 입어 두고 갈게. 빨아다 줄까?(싫다고 해도 결국 두고 가신다)"

" 이 시래기밥에 잘 익은 이 김치 얹어서 구운 김 이거랑 싸 먹어야 제일 맛있어. 이렇게 먹어봐(하며 싸서 굳이 입에 넣어주시려고 한다. 받아먹을 때까지.)"

 

좋게 말하면 단호함 나쁘게 말하면 너무 극단적인 말투가 싫어서, 나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너무 '안 단호한' 말투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쩜 이렇게 '적당함'을 유지하기가 힘들까.



점점 더 말 한마디를 뱉기가 어려워진다.

" 엄마는 꿈이 뭐였어?"

단순한 질문인데,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꿈이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없었다고 말하면 교육적으로 안 좋을 것 같고. 그렇다고 괜찮은 게 생각은 안 나고.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꿈이라고 하기엔... 회사원 자체가 꿈인 건 너무 별론데, 뭐라고 대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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