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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Aug 31. 2020

첫째 딸과, 둘만의 데이트

식구가 많아도, 다 같이 북적댈 때가 대부분이라 정작 한 아이 한 아이를 1:1로 마주할 때는 많지 않다. 그래서 종종 아이 하나와만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아이와는 둘만의 데이트이니 다른 식구들에겐 비밀로 하기로 약속하곤 한다. 최근엔 막내 아이와 하원길에 평소에 비싸서 잘 가지 않는 빙수 맛집에서 빙수 한 그릇 하는 데이트를 했고, 둘째와는 아크릴화 그림을 그리는 원데이 클래스를 함께 다녀왔다.


그리고 오늘은, 두어 달 전부터 예약을 해놓고 벼르던 첫째와의 데이트 날이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나와서, 자개 팔찌 만들기와 색연필 그림을 그리는 원데이 클래스를 하려고 한다. 주 타깃이 커플이나 직장인 등 어른 위주이긴 하지만, 이 녀석은 손끝이 야물어 자분자분한 만들기를 잘하니까 무리 없이 하리라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지하철을 타고 나와야 하는데, 아이가 티머니를 잃어버렸단다. 시간은 다가오고 급한 마음에 굴러다니던 다른 티머니를 들고 지하철을 탔는데 이런, 잔액이 없단다. 충전을 하려고 하니 이런, 현금이 한 푼도 없다. 충전기를 돌아봐도 편의점에 물어봐도 현금으로만 충전이 가능하단다. 동동거리다가 결국 역무실에 찾아가 현금 만원을 빌리고 계좌이체해드리고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연발하며 겨우 개찰구를 통과했다. 어쩐지, 부산스럽게 시작하는 데이트다.


주소 한 줄 받아 들고 지도 앱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겨우 원데이 클래스 장소를 찾았는데, 분명히 이 건물인 거 같은데 도통 입구가 보이질 않는다. 원데이 클래스 앱에다 문의하려니까 주말엔 문의를 받지도 않는다 하고, 원데이 수업장소 전화번호는 일부러 뺐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비슷한 키워드로 무작정 다른 블로그 검색을 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젊은 남자가 빼꼼 얼굴을 내밀더니 수업 온 거냐 묻는다. 아, 다행이다.


자개로 만들어진 트렌디한 작품들이 걸려있고 여기저기에 도구들이 보이는 공방 분위기가 맘에 든다. 딱 선생님과 우리 둘, 멤버도 맘에 든다. 자개에 대해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작은 자개 조각들을 붙여 만드는 자개작품들이 얼마나 공이 들어가는지도 절실히 느껴진다. 보통 이런 작업을 하게 되면 가능한 큰 거, 가능한 가득, 가능한 빽빽이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인데, 첫째 하나는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 아이가 절제할 줄 아네 싶어 신기하다. (정작 나는 빈칸을 냅두지 못하고 채우고 채우다 결국 꽉 채우고 말았다. 하하) 둘이 도란도란 얘기하며 만드는 느낌이 좋다. 팔찌를 다 만들면 서로 선물해주기로 했다. 그저 팔찌 만드는 건데, 얘기를 하면서 만드니 더 의미가 커진다. 한 시간여의 수업 끝에 나온 작품! 만족스럽다.




선생님이 추천해준 일본 가정식을 파는 가게에 간다. 아이는 가게가 예쁘다며 한껏 흥분했다. 정갈하게 담겨 나온 음식 사진도 예쁘게 찍고, 제법 양이 많았는데 맛있게 다 먹었다. 아이가 오늘은 집에 가자마자 일기를 써야겠다며 재잘대는 걸 보니 그저 좋다. 열두 살, 이 사춘기 아가씨를 웃게 하기가 참 어려운데, 행복해하니 좋다.


두 번째 수업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서 걷기로 했다. 신발이며 액세서리 쇼핑도 하고, 후식으로 티라미수와 커피도 먹고, 수업장소에 도착하니 선생님과 다른 수강생 두 명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냥 그림 그리는 수업인 줄 알았는데, 자기소개도 하고, 인생그래프도 그려보고, 인생그래프에서 연상되는 무언가를 그리는 의미 있는 수업이었다. 내 인생그래프는 굴곡이 많다. 우울함이 바닥을 쳤다가 즐거움이 꼭대기를 쳤다가 뾰족뾰족하다. 열두 살 첫째의 인생 그래프는 어떨까. 6세부터 있었던 일을 회고하면서 열심히 적는데, 슬쩍 보니 행복한 일이 대부분이고, 불행한 일은 올해 코로나 때문에 우울하다는 것이다. 나쁘지 않군.



나는 쥐가오리, 큰 애는 좋아하는 웹툰의 장면을 그리기로 했다. 스케치하고 캔버스에 옮기고 칠하는 과정. 처음엔 빈 캔버스에 줄을 긋기가 부담스러웠는데 하다 보니 수월하다. 거침없이 그리고, 선생님이 손도 좀 봐주시고 하니 제법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왔다. 보통 하얀 바탕에 색을 칠하는데, 여긴 까만 캔버스에 색을 칠하는 거다 보니, 어두운 색이 아니라 밝은 색을 표현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밝음이 있어야 어두운 색이 대비되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생각해보면 내 뾰족뾰족한 인생그래프도, 슬럼프가 있었기에 좋은 날이 온 걸 느낄 수 있었던 거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내리막이 있어야 오르막인 걸 아는 법이니까.


그렇게 나온 작품. 아이가 자기 그림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다. 화장을 주제로 한 웹툰의 한 장면으로, 빛이 있을 때의 화장과 어두울 때 드러나는 화장을 대비하여 표현한 거란다. 나도 그림 그릴 때 빛과 어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는데, 아이도 빛과 어둠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고 그렸으려나? 언젠가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집에 돌아 바로 뻗어버리긴 했지만, 즐거운 데이트였다. 시간이 지나가고 기억이 희미해지겠지만, 아이에게도 특별한 하루로 남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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