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선씨 Sep 24. 2020

소 키우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한창 내년 사업전략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최초에 사과만 했던 목표는, 팀장 보고, 상무 보고, 대표이사 보고를 거치는 동안에 수박만 하게 불어났다. 업무 리더들은 그 보고서를 작성하고 검토하고 리뷰 내용을 수정 반영하느라 골방에 처박혔다. 실무자인 나는, 리더가 부재한 탓에 더 불어난 실무를 꾸역꾸역 메꿔야 한다.


소외감이 든다. 내가 하는 실무가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현실은 대추 수준인데, 사과도 굉장히 도전적으로 잡은 목표였는데, 어느새 수박만큼을 해내라고 한다. 현 수준에서도 허덕이고 있다는 걸 다들 알 테지만 경영계획 시즌인지라 절대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분위기다. 수박을 논하고 있는데 대추가 웬 말이랴. 이 와중에 내 업무실적이 제대로 평가받기는 쉽지 않다. 연초 목표인 대추를 해내었다지만, 수박을 해야 하는 시점에 '겨우' 대추에 머물러 있는 꼴이 되었다.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쭉쭉 올라가는 걸 보면 회의감이 든다. 화려한 말들의 향연이 무슨 가치가 있냐며 소를 키우는 일에 매진했던 내가 멍청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필을 잘 못한 건지, 윗사람들은 별 말 안 해도 소가 키워져 있는 걸로 보이나 보다.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고, 회사 일에 있어서 애쓰지 않았는데 저절로 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소 키우는 일의 어려움을 모르는 상사 밑에서, 내가 굳이 '당연한'일을 해야 할까 싶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대단한'일을 해야 고과며 승진이며 챙길 수 있는 건데, 뭣이 중허다고 소를 키우고 앉아있었나 의구심이 든다.


그저 일인 것을, 그냥 하면 되지 말이 많았다. 왜 자꾸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드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월급 받으니까, 그저 시키는 일만 생각 없이 하면 되는 건데,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나보다. 도무지 나 자신이 설득되지 않는다. 기왕 공들이는 일, 커리어에서도 인정받고 싶고 회사에서도 필요한 일로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들인 노력이 약소하게 되어버리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다.



기회비용이 높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소중한 내가, 육아와 집안일을 포기해가면서 하루의 절반을 투자하는 일인데, 평가절하되는 걸 견디기가 힘들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과 회사에서 보는 것 사이에 갭이 큰 셈이다. 이 간극을 어찌해야 할까. 회사에서 인정해주기는 그른 것 같으니, 이젠 나 스스로 내 일의 가치를 후려쳐야 하는 건가.


슬픈 주문을 외워본다.


소 키우는 일 따위, 누군가 그냥 하는 거야. 당연히 되어 있는 거지. 별 거 아닌걸 뭘 그렇게 잘났다고 떠드는 거니. 월급 주는 회사 입장이 백번 맞는 거야. 그러니 이제 포기하렴.
안타깝지만 네 일은 대단하지 않아. 그저 당연한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17년차 워킹맘, 처음으로 이직을 시도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