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끄트머리가 노란 휴대폰 충전기에 한참을 꽂아놔도 충전이 쪼끔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충전기는 집안 여기저기 널려 있으니까 노란색 충전기의 못미더움이 떠오른 날에는 다른 색 충전기를 찾아서 충전하곤 했다. 물론 미처 기억해내지 못하고 노란색 충전기에 꽂아두었다가 후회한 날도 있다. 빈도 수로 보면 반반쯤 될까. 이번 주말, 온 가족이 식탁에 모여있는데 어쩌다 노란색 충전기 얘기가 나왔다. 큰 애가 말한다.
" 저 충전기, 언제부턴가 느려졌어."
오, 그간 애매했던 내 느낌이 확신으로 바뀐다. 저 충전기는 고장 난 게 틀림없다.
" 맞아, 신랑. 저 충전기 예전엔 잘 됐는데 요즘은 한참을 꽂아놔도 충전되는데 오래 걸리더라고."
그 전까지만 해도, 폰의 커넥터에 물이 들어간 게 아닌가, 헐렁하게 대충 끼워놔서 그런 게 아닌가 다양한 추론을 펼치고 있던 우리 집 케이블 전문가 남편은, 두 사람이 똑같은 증상을 토로하자 싸구려 충전기가 망가졌다는 진단을 확정했고(세 개에 2,900원짜리 충전기였다), 정품 고속 케이블로 교체해줬다.
노란색 케이블의 최후를 보는데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요즘 내가 나를 '성능이 형편없는 배터리'같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순식간에 방전되고, 완충은 되지 않는 배터리. 코드는 등짝에 붙어있어서, 바닥에 오롯이 누워있어야만 충전되는 답답하고 큰 배터리. 충전하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리고, 방전되는 데는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오래된 배터리.
어쩐지 나 같아서, 상태가 좋지 않은 노란색 충전기한테 투덜대면서도 다시 살아나는 걸 보고 싶었나 보다. 결국 노란색 충전기는 교체되었다. 성능이 나빠진 '나'라는 배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입버릇처럼 쉬고 싶다고 말하는 요즘이다. 24시간 정도 가만히 있으면 완충되지 않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저 가만히 있고 싶다.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조금은 있었으면 좋겠다. 회사일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일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집에서 나오면 회사고, 회사에서 나오면 집이니 도대체가 혼자서 마음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안쓰러워하는 상사가 말한다.
"재택근무 기회가 되면 대상자로 해줄까?"
나에게 재택근무는... 회사 일은 일대로 하면서 대충이라도 애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라는 뜻이다. 누군가에겐 출퇴근 없으니 좀 더 수월해 보일 수 있겠으나 나에게는 두 배 이상 힘든 것이라 단박에 거절했다.
"저는 회사 나오는 게 더 편해요. "
쉬고 싶다고, 몇 시간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고, 혼자 있을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며 캡슐 방 같은 데라도 갇혀있고 싶다고 하니까 신랑이 말한다.
"그러다 관에 들어가."
나도 두렵다. 이렇게 점점 충전능력이 저하되다가 못 움직이게 되는 건 아닐까. 하루하루 일어날 때마다 찌뿌드드함이 점점 더 심해지는데, 뼈랑 근육이 굳어버리는 게 아닐까 무섭다. 잘 모르는 사람은 쉽게 조언한다.
"운동을 해."
운동할 짬조차 내기 힘든 현실을 알기나 할까. 집에 돌아와 애들 밥 다 챙겨주고 밤 9시에 나가서 하는 요가를 해봤는데 우선순위에서 자꾸 밀려서 결국 안 가게 되었다. 홈트라도 해보려고 애써봤는데, 좀 할라치면 애들이 옆에 와서 같이 하자니 이게 맞느니 어쩌느니 의도치 않은 '방해'를 하는 통해 '제대로'하기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어쩌다 한 번씩 계단 오르기 하는 게 내 최선이고, 내 현실이다. 무언가를 병행한다는 건 어지간한 의지로 되지 않는데, 다른 일들이 많아서 운동이 의지를 불태울 만큼 우선순위가 높지 못하달까. 결국 운동을 하려면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데, 지금 더 포기할 수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다.
첫째 낳고 육아 휴직하던 때에, 약학대학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었다. 규칙적이지 않은 아이를 케어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애가 언제 깨고 언제 배고프고 언제 쉬할지 모르니, 작정하고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지금부터 한 시간 딱 공부해야지. 이런 게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인강도 최대한 빨리 2배속으로 정신없이 듣고, 학교 가야 할 때는 시터한테 아이 부탁하고, 회사 다닐 때는 아이 맡겨두고 퇴근하고 도서실 가서 한다고 했는데, 시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불합격일밖에. 아이가 곁에 있으면 '계획'하고 '집중'해야 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던 경험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격증을 꽤나 많이 딴 편인데, 아이를 낳은 이후로는 자격증을 하나도 따지 못했다. 집중할 몇 시간을 내는 일이 너무 버거워서, 시도도 잘 못했던 것 같다. 혼자 나가서 공부할래도 애를 어딘가에 맡겨야 하고, 맡기기 위해 소싱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잘 안 하게 됐다. 어쩌다 한 두 번은 어떻게 한다 쳐도, 오랜 기간 공부해야 하는 건 맡기는 사람도, 맡아야 하는 사람도 부담이라 피하게 되는 거다. 아이를 모두 맡아 돌보는 건, 배우자에게도 선뜻 얘기하기 어려운 일이다. 최근까지도 아이 셋을 한 명이 다 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어서, 부부 둘이서 아이 셋을 같이 보거나, 아이 둘, 하나 나눠서 보는 게 그나마 서로에 대한 배려였으니까. 부부끼리도 이럴진대 다른 누군가에겐... 말도 꺼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나'라는 배터리 상태가 좋지 않은데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항변이다. 운동할 시간을 내기도, 쉴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투덜대기보다는 방법을 찾고 싶은데, 모르겠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나를 챙길 시간이 생길 것 같은데 더 이상 포기할 것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랄까.
그저 너무 쉬고 싶어서, 정말 지금 난 쉬어야겠다며, 대책 없이 충동적으로 이번 주에 휴가를 냈다. 휴가를 낸들, 등 대고 누워 쉴 곳이 없다. 집에 있으면 학교 안 가는 아이가 곁에서 맴돌 것이고, 집 밖에는 맘 놓고 쉴만한 곳이 없다. 현실이 쉽지 않은 건 알지만 일단 휴가는 냈다. 쉬고 싶으면 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제길, 쉬는 것도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야만 가능한 건가.
그냥 좀 혼자 있고 싶다는데, 이게 그렇게 어려울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