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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Nov 02. 2020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결과

특별한 이벤트를 찾아 주말 일정을 만드는 것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 중 하나다. 얼마 전 주말에 무료로 운영하는 동네 문화해설 프로그램 소식을 캐치했다. 동네를 걸으면서 관련한 역사해설을 듣는 건데, 무료이기도 하고 평도 괜찮아 보였다.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니 첫째와 둘이서 함께 들으면 좋겠다 싶어서, 문화해설코스와 주말 일정을 모두 고려해 참석 가능한 프로그램을 전부 신청했다.  


신청하고 얼마 안 있어서 담당 해설사에게 연락이 왔다. 일요일 프로그램을 담당하신다며, 필요한 유의점과 준비해야 할 사항을 일러주셨다.

우리가 모이는 장소는 OO역 몇 번 출구로 나오면 조형물이 있는 곳이에요. 차를 가져오시면 주차는 OOO에 해야 해요.
오시기 전에 아이들에게 도미 설화를 꼭 찾아서 들려주세요. 마지막 코스에서 관련 내용에 대해서 얘기해보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코로나 때문에 발열 체크하고 인적사항을 기록하게 될 거고요. 아무래도 마스크를 써야 하고 인원이 많아서 제가 수신기를 준비했어요. 수신기에 꼽는 이어폰은 각자 챙겨 와 주세요.
프로그램 중에 약간의 환경 정화 활동도 할 거고요. 환경정화활동은 봉사활동으로 1365에 등록할 수 있으니까 관련 정보를 문자로 미리 보내주시겠어요?


등등... 몇 번을 전화하고 문자하고 했는지 모른다.

해설사분의 열의에 나도 어느덧 반응하고 말았다.

"혹시, 다른 참석자는 어떻게 되나요?"

"참여하는 다른 가족이 있는데 그 가족은 6세 아이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예요."

" 아 우리 집도 아이가 3명이에요. 나이가 어려서 신청 안 했는데, 같이 갈까요? 그럼 부모랑 아이 셋, 총 다섯 명 참석이에요."


금요일쯤 되었을까. 해설사분께 또 전화가 와서 또 다른 안내사항을 일러주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일요일에 종일 비가 온다는데,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했기에, 안내사항을 다 듣고 나서 여쭤봤다.

"그런데요 선생님, 일요일에 비가 온다는데 어떻게 되나요?"


해설사 분은 정말로 모르셨던 듯, 너무 놀라고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아.. 아.. 비가 오나요? 아.. 음.. 비가 오면 취소하실 수도 있고요. 아.. 구청에 취소 전화를 해주시면 되는데요. 하지만 우천 시에도 진행은 합니다. "


조금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온다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을까, 특히 막내까지 가기엔 좀 힘들 텐데. 비 온다 그러면 아마 많이 취소하지 싶은데.

비 오는 일요일,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던 1시쯤이었다. 해설사분 전화가 왔다.


" 안녕하세요~ 오늘 3시 프로그램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

" 아 안녕하세요. 오늘요, 혹시 저희 가족 외에 참석자가 어떻게 되나요?"

" 아 예 원래 다른 두 팀이 있었는데 취소하셨어요. 선생님 댁은 참석하시겠지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하아, 그냥 '오늘 비 오는데 참석하시나요?' 정도로만 물어봤어도, '비가 와서 불참입니다.' 했을 텐데, 저렇게 들뜬 목소리로 이 집은 오겠지라며 전화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나. 솔직히 비올 때 나가기 싫은데, 이렇게 비가 오는데 해설이 되기나 할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오로지 해설사분을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참석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와 첫째, 둘째는 비 오는 거리로 나갔다. 열정 넘치는 해설사분이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는데, 기본적으로 내용이 첫째가 겨우 이해할 정도로 좀 어렵고, 재미있게 말하는 스킬은 없는 분이셨다. 처음에 의욕적으로 참여하던 둘째도 점점 바닥만 긁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웬 고생인가 싶고, 해설사분의 설명은 점점 더 길고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직언을 할 수도 없고, 신발은 비에 다 젖어버려 축축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둘째가 나를 보고 묻는다.


엄마, 지금 몇 시야?


아, 뜨끔하다. 둘째가 많이 힘들구나. 많이 지루하구나. 미안하다. 엄마가 괜한 걸 추진했나 보다. 비 온다고 할 때 눈 딱 감고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정말로 후회스러웠지만 해설사 분도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말할 수도 없으니 속마음을 뒤로하고 곧 끝나마고 아이를 토닥였다.

 어찌어찌 두 시간의 해설이 마무리되었다. 내용면에서 재밌는 부분이 많긴 했으나(아마도 나에게만), 둘째에겐 어렵고 지루했던 시간인 게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비 오는 날 불편함을 감수하고 듣기에는 힘든 시간이었다.


아니다 싶을 때, 거절했어야 했다.


고민하는 나를 참여하게 만든 해설사님의 열정은 존경하지만, 내가 너무 그분의 열정에 매여서 우리 가족의 일정을 결정했다.


이제, 둘째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5시, 집에 가서 저녁을 챙겨 먹어도 빡빡한 시간인데, 둘째가 모험놀이터에 가서 놀고 싶다는 걸 거절하기가 힘들다. 고생했는데, 비도 그쳤는데, 아이가 놀고 싶다는데, 애들 씻기고 먹이는 거 좀 미루고 가도 될까 고민이 된다. 어쩐지 이번에도 거절하기가 미안한 마음에 결국 온 가족을 모험놀이터에 데리고 가게 됐다.

다행히 모험놀이터의 2시간은 아이들이 즐거워해서 하루가 즐겁게 마무리되었으나, 생각하게 되는 하루였다.


거절하지 못해 생긴 일련의 일들. 나는 뭘 배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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