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다. 아이들이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오셨어요~"
" 엄마 헬로~"
" 어린이들 안녕~"
인사하며 둘러보니 낯선 신발이 있다. 친정엄마 신발이다.
' 또 예고 없이 오셨구나. 오늘은 또 뭘 잔뜩 가져오셨을까.'
친정엄마는 늘 이렇게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오신다. 현관에 들어서니 침대에 누워계신 엄마가 보인다.
' 또 피곤하셨구나. 어디서 또 무리하셨겠지.'
식탁에 보니, 꽈배기가 한 봉지 있다. 대충 봐도 열 개 이상 들어 있는 것 같다. 정확히 3일 전에도 저만큼을 우리 집에 두고 가셨고, 우리 집은 그 꽈배기를 어제까지 꾸역꾸역 먹었었다. 오늘 또 갖다두셨으니 또 3일은 먹어야 없어질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엔, 두개만 먹고 일찌감치 나머지를 얼려두는 게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주무시는 엄마를 두고, 아이들 저녁밥을 차린다. 반찬이 마땅치가 않다. 엄마한테 한 소리 듣겠구나 싶다. 엄마 밥을 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엄마 밥도 퍼 둔다. 늘 입맛 없다고 안 드시겠다고 하시지만 결국 음식 남는 꼴을 보지 못하고 다 드시니까. 밥을 안 차리면 저 꽈배기만 드실 테니까.
후딱 계란 프라이 하고, 베이컨 굽고, 냉장고의 김치와 이모님이 해두신 호박전을 차린다. 마침 깨어난 엄마에게 식사하시라고 권하니, 아니나 다를까 '밥은 안 먹는다'라고 하신다. 차린 김에 드시라고 그게 나도 더 편하다고 두어 번을 더 반복하니 그럼 반공기만 먹겠다며 식탁에 앉으신다.
'이럴 줄 알았어. ' 싶지만 말로 하진 못한다. 나는 꾹꾹 참는 중이니까.
뭔가 공기가 다른 걸 느꼈는지 큰 애가 할머니의 말끝마다 말을 덧붙인다.
"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들었네. 어제 어딜 다녀왔더니."
" 할머니, 그러니까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제 때 주무세요. "
" 아이고 이거 남기면 안 돼 골고루 먹어야지(하시며 남은 반찬을 다 드신다.)"
" 할머니, 음식 남은 것좀 드시지 마세요. 남겨도 돼요."
가만 듣다 보니 딱 내가 엄마한테 하던 소리다. 말해봐야 엄마가 바뀌지 않는 걸 알면서도 답답해서 반복해 말하던 나는 이제 입을 닫았지만, 내 워딩은 그대로 내 딸에게 옮겨가 버렸다. 아이가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하는 형국이니, 아이의 까칠한 말을 듣는 내가 민망하다. 슬쩍 아이한테 입 다물라 눈짓한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못 보던 옷이 놓여있다. 하, 보나 마나 엄마가 입겠다고 샀는데 작아졌거나, 어디서 떨이하는 거 여러 벌 사 오셨을 것이다. 늘 내 취향은 엄마의 고려사항에 없었으니까. 엄마는 늘 똑같은 옷을 여러 벌 사니까. 그래서 나는 평생 내가 고른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평생 딱 맞는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어릴 땐 더 클 거라면서 큰 옷을 사 오셨고, 지금은 엄마가 여기저기서 '넉넉한 사이즈'의 옷을 사오시니까. 옷을 들어보니, 똑같은 디자인의 커다란 옷이 두 벌이다. 그럼 그렇지. 매사 이렇지, 내가 옷 정리하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수납공간이 없어 버려도 모자랄 공간에 내 취향과 상관없는 옷이 들어와버렸다. 또,또 엄마 때문에. 또 내 의사는 무시당했지 싶은 순간, 나도 뿔이 나버렸다.
"아 엄마! 옷 좀 갖다 놓지 마요. "
" 그거 새 옷 주머니 달아서 수선한 거야. 이뻐."
하아, 예쁜 옷도 아니고 그냥 티셔츠를 사서 수선까지 하셨다고 한다. 구매가보다 수선비가 더 들었을 것 같은데. 사이즈도 105는 될 것 같은데, 이걸 나더러 입으라고 가져오신 건가. 정말 나는 엄마가 저 옷에 쏟은 돈과 시간이 너무 아깝다. 내색해봐야 소용없는 거 알지만 속이 터진다.
엄마는 말을 이어간다.
" 화엄사에 25년 된 스님이 아토피 약을 만드는데 용하단다. 두나 아토피 고쳐야 하지 않겠니. 아이를 보면 좋겠다는데 내가 데리고 가긴 힘들고..."
화엄사? 설마 지리산 화엄사? 내가 대답이 없으니 큰 애가 말한다.
" 할머니, 거기까지 가는 건 불가능해요. 할머니도 못 가는데 아빠가 가기는 더 힘들죠. "
" 왜 너네 목포에도 다녀오잖아."
" 할머니, 명절에 가는 거랑, 약 때문에 가는 건 다르잖아요."
" 아니, 병을 고쳐야지. 이것도 중요한 일이지."
듣다 보니 속이 터져 자리를 피한다. 엄마는 늘 그렇다. 어떤 것에 꽂히면 무리수임이 분명한데도 추진하고야 만다. 언젠가 기어코 화엄사의 약을 가져오시겠구나 싶지만 입을 닫는다. 얘기 끝에 엄마는 친구네 가셔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우리는 엄마를 배웅했다.
한참 아이들 숙제며 집안일을 정리하고 있으니 어느덧 잠잘 시간, 10시다. 벨이 울려서 아이들이 뛰어나간다.
"아빠~오셨어요! 엇, 할머니?"
으레 신랑의 퇴근시간이니 애아빠려니 했건만, 아까 가셨던 엄마가 다시 돌아오셨다. 무슨 약병을 하나 들고 오셨다. 그 약이란다. 친구 집에 가서 귀하게 얻어오셨다 한다. 그럼 그렇지... 싶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쓴다. 엄마는 저걸 갖다 줘야만 마음이 편할 테니까.
"아이 상태를 봐야 한다면서요. 누구 약인데요."
"아이를 보면 더 좋겠다는 거지. 친구 집에서 구해왔어. 한 번 발라보자. "
엄마는 저 약을 발라줘야만 마음이 편할 것이다. 길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설명해야만 오늘 저녁이 마무리될 것이다.
"엄마, 두나 요즘 연고 발라서 많이 나았고, 지금은 손만 좀 심해요. 손에다 바르면 자기 전까지 뭘 할 수가 없으니까 자기 전에 내가 발라줄게요. 어떻게 바르면 돼요?"
"그래 그럼 이렇게 이따가 발라줘."
드디어 진짜로 엄마가 가셨다. 겉으로만 평화로웠던, 내 마음속은 너무나 시끄러웠던 오늘 저녁. 문제는 이런 저녁이 언제 또 다가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엄마는 또 아무 때나 와 있을 테니까. 오기 전에 얘기좀 해달라는 내 말을 13년째 들어주지 않으시는 우리 엄마. 아무리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엄마도 변하지 않고, 답답한 내 마음도 변하지 않는 걸 보면 둘 다 참 어지간하다.
하아, 대나무 숲에다 고백하듯, 아니, 정확히는 배설하듯 써내려 버렸다.
편해지고 싶은데,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관계도 풀리지 않는다. 아마 나는 오늘 밤에 또 한참을 고민하다 잠들 것이다. 나와 엄마의 관계에 대해서, 이 관계가 내 아이들에게 대물림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