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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Nov 10. 2020

남편도 모르는 나의 수고

지나간 일은 잘 잊어버리는 편이다. 가끔, 이런 성격이 회사일 하며 아이 셋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도 생각한다. 힘들었던 기억을 곱씹었다면, 적어도 워킹맘 노릇은 계속하지 못했으리라. 


대부분의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몇 가지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육아라는 걸 한 지 10년이 넘었건만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아마 이것들은 하도 서러워서, 하도 힘들어서 내 심장에 콱 박혀있나 보다. 


첫째를 키우며 둘째를 임신했을 때였다. 퇴근하고 돌아와 윗 집에 맡겨둔 아이를 데리고 와서 그때부터 집안일도 하고 아이도 봐야 했다. 퇴근길 버스 안이 어찌 보면 쉬는 시간이었는데, 버스 안에서조차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버스가 밀릴 때면 윗 집에도 동동거리며 죄송해해야 했고, 신랑에게도 일찍 올 수 없느냐며 미안해해야 했다. 버스를 타는 곳이 회차 지점이라 대부분은 앉아서 올 수 있는 편이었는데, 만삭인 어느 날은 자리가 없었다. 1시간이 넘게 걸리는 버스에서 나는 임산부석 앞에 서있었고, 임산부석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1시간 내내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쩜, 쏘아보는 눈길도 모를까. 해탈해가던 나는 버티다 버티다 하차 10분 여를 남기고 주변 사람들이 우어 하고 놀랄 정도로 쓰러질 듯 크게 휘청했고, 그 사람은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죄송하다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날 다짐했다. 치사해서, 대중교통 타고 출퇴근 못하겠다고.  


신랑은 새벽에 출근했기에 아이 등원은 항상 내 몫이었다. 첫째가 4살, 둘째가 2살일 때 나는 아침마다 두 아이를 각기 다른 어린이집에 맡겨놓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가며 1시간이 넘게 걸리는 회사에 출근을 해야 했다. 첫째는 밤마다 실수를 하기 일쑤였고, 둘째는 말을 듣지 않는 나이였다. 아침시간은 늘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렸다. 아이 둘을 어르고 달래서 잘 떨어지지도 않으려는 둘째를 가정형 어린이집에 억지로 밀어 넣고, 첫째는 데리고 나와 또 걸어서 다른 어린이집에 들어가게 하고 버스시간 초조하게 봐가며 종종 뛰어서 출근했다. 그렇게 애써서 출근한 어느 날, 결국 지각하고 말았다. 지각이야 종종 했었겠지만, 그 날은 상사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그 날 깨달았다. 더 이상 이렇게는 출퇴근 못한다는 걸. 


마침 회사 어린이집이 생겼고, 회사 어린이집에 '당첨'된 것을 빙자해서 회사 근처로 이사 왔다. 아이들 등 하원에 시달리던 내 관심사는 '회사와 걸어서 아주 가까운 집'이었다. 회사를 중심으로 반경 500m 원을 그려서, 그 안에 있는 집으로 무리해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혼자 뛰어가면 5분도 안 걸릴 거리였지만, 두 아이를 데리고 가면 만날 알 수 없는 일들이 생겨서 20분이 걸린다. 비 오는 월요일이었다. 빠른 등원을 위해 어린 둘째는 유모차에 앉히고, 첫째는 우산을 들게 하고, 비 맞는다고 투정할 수 있으니 둘 다 우비를 입히고, 월요일에 챙겨야 하는 커다란 이불가방을 두 개 유모차에 걸고, 나는 양손으로 유모차를 밀어야 하니 유모차에 우산을 걸치고 어깨로 겨우 우산 중심을 잡아가면서 짧디 짧은 등원 길을 걸었다. 겨우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회사에 들어섰는데, 내 겉옷은 다 젖어있었다. 갑자기, 서러워졌다. 그저 비 맞은 내가 불쌍한 거였는지, 최선을 다해도 이모양인 게 슬픈 거였는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서러웠는지 모르겠지만, 서러웠다.


아이가 셋이 되었고, 집주인이 집을 팔아버리는 바람에 이사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이제 첫째는 학교에, 둘째는 회사 어린이집에, 막내는 아파트 다른 동의 가정형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해야 한다. 앞으로 닥칠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여서, 또다시 집 주위로 반경 500M 원을 그렸다. 

'집 근처에 회사, 학교, 가정형 어린이집이 있어야 할 것'

집을 고르는 주요 기준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신랑에게도 설명했고, 신랑도 알아들은 듯했다. 그렇게 집을 골라서 이사 와서 살고 있다. 


어제 신랑은, 이 집을 고른 건 확고한 내 주장 때문이었으며, 본인은 좀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었다고 불만을 토했다. 신랑의 말 어디에서도, 한결같이 12년째 등원을 시키는 어려움에 대한 이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이 상한다. 신랑과는 평소에 아이들 키우는 것에 대한 힘듦을 함께 토로하고 토닥였기에, 적어도 신랑은 아침에 아이들 챙기는 것의 어려움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제 깨달았다. 신랑은 등원의 어려움을 하나도 모른다. 낡은 이 집이 아니었으면 나는 워킹맘 노릇을 지속하지 못했을 거란 걸 모른다. 신랑도 결국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본인이 안 하는 것에 대해선 이해하는 척만 했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나도 편도 2시간씩 출퇴근하는 신랑의 어려움은 공감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등원시킬 일이 없어질 테고 아이들이 크면 힘듦이 덜해질 것이니 더 희미해질 테지만, 조금 슬프다. 부부간에도 서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10년 넘게 등원시킨 내 노고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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