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선씨 Nov 19. 2020

넌 더 잘할 수 있었잖아

학창 시절, 체력장 때였다. 키 순으로 둘씩 짝을 지어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100M를 달리고, 몇 초에 들어왔나 기록했다. 나랑 같이 뛰는 친구는 덩치가 좀 있는 친구였는데, 기록이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로 우리 둘은 기를 쓰고 달렸고, 둘이 비등비등하게 도착했다.

결과는, 25초! (둘 다 지독히도 달리기를 못하는 편이었다.)

숨을 고르며 '최선을 다해도 결국 또 25초네, 발이 느린 건 어쩔 수 없지'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를 보고 있던 반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배를 잡고 웃는 것이 아닌가. 뭐가 웃긴 거지? 우리 둘은 열심히 달린 것뿐인데.


나중에 들어보니, 같이 달린 친구는 기를 쓰고 헉헉대며 악착같이 뛰는 데 반해, 나는 굉장히 겅중겅중, 술렁술렁 뛰는 것처럼 보였단다. 둘이 그렇게 상반된 자세로 뛰었는데 국 똑같이 들어온 게 너무 웃겼단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넌 왜 열심히 안 해? 더 잘할 수 있었잖아.

어라? 좀 억울하다. 나도 열심히 뛴 건데. 내 달리기 폼이 그런 것 뿐인거야. 내 평생의 달리기 실력은 100M 25초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우리 엄마는 내 아이들한테 종종 말하곤 한다.  

" 느이 엄만 공부 잘했어. 좀만 더 열심히 했으면 더 잘 됐을 거야. 게을러서 그렇지."

음... 학창 시절에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는데.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잠을 더 많이 잔 건 사실이지만, 잠을 줄인다고 공부가 되는 게 아니어서 효율적으로 하려고 엄청 노력했던 거였다. 공부를 안 했는데 공부가 될 리는 없지 않나. 엄마한테는, 그저 게으르게 보인 건가.


돌아보면, 예전에도 나는 그렇게 보였던 거다.




요즘 회사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낀다. 앓는 소리를 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놓고, 정리해놓고, 상사의 판단이 필요할 때만 상사에게 이야기하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내가 하는 일이 쉬워 보이나 보다. 나랑 똑같은 일을 다른 이가 할 때는 주간업무에도 써서 어필해주고, 앓는 소리 하는 것도 들어주면서 챙겨주는데, 내가 할 때는 당연한 것처럼 그냥 넘어간다. 몇 번 보다 보니 좀 발끈한다. 아니, 똑같은 일인데, 난들 그저 쉽게 했을까? 최대한 알아서 하려고 애쓴거지. 적어도 상사면 무슨 일 하고 있는지 알텐데, 그걸 말해야 아나?


돌아보면, 지난번에 피드백도 그렇게 받았다.

김 매니저는 뭐랄까, 욕심이 없어 보여. 정말 인정받고 싶은 거 맞아? 사람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떡 하나 주게 되더라고.


어디가 문제일까. 태도의 문제인가. 힘들다고 한숨 쉬고 어렵다고 문제가 생겼다고 건건이 얘기해야 하는 걸까. 그간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했는데, 나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라도 말을 해야 할까. 어필을 잘 하는 것도 능력이 되는 세상이다. 일을 얼마나 했느냐보다 알리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는거다.

정신차려. 뭐가 중요한지 잘 파악해야 해. 멍청하게 꾸역꾸역 일만 하고 있지 말고.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도 모르는 나의 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