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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Nov 30. 2020

BadMom이라니, PoorMom이지

20년 된 학창 시절 친구들과 1년에 한 번 얼굴을 본다. 졸업하고 직장 다니며 애 둘, 셋을 키우는 워킹맘인 우리들은, 1년에 한 번인 이 날을 위해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가족들에게 사전 동의를 구했다.(정확히 표현하자면, '약을 쳤다'.) 숙소에서 1박을 하는 게 우리 목표였는데, 세 집에서 외박이 '허가'될지 알 수 없어서 예약할 때부터 고민이 많았다. 하루 전날까지 기본 2인 최대 3인인 방으로 잡되, 혹 누가 오지 못하더라도 서로 묵인하기로 합의한 후 겨우 예약할 수 있었다. 저녁식사는 나름 '핫'한 곳으로 가고 싶었는데, 그 식당은 인스타로만 예약을 받는다고 한다. 인스타 디엠이란 걸 할 줄 아는 유일한 친구가 예약매진되었다는 걸 수 차례 취소분 없는지 확인해서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어렵게 어렵게 성사된 만남. 이렇게 준비를 했어도 애엄마들의 만남은 만나는 그 시간까지 확정적이지가 않다. 만나기 2시간 전까지도 외박이 가능할지 확답을 못주는 친구. 이 친구는 나오기 직전까지 아이들 문제집 푸는 거 봐주다가 겨우 맞춰 나왔단다.

애들은 친정에 보내 놓고 최대한 빨리 오겠다더니 청소하고 빨래 정리하느라 결국 늦어버린 친구. 이 친구는 일하면서 수업도 듣고 사회생활에도 열심힌 남편한테 1박동안 아이를 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싶어 했는데, 결국 이 날조차 남편이 일이 있어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나와야 했다. 친정에 맡겼으니 빨리 찾으러 가야 하는 상황.

그리고 나는 남편과 딜을 했다. 내가 이 친구들을 만나는 대신, 남편은 술자리를 4번을 잡았다.


그렇게 애써서 만난 우리들은 맛집이라는 곳에서 샌드위치도 포장해다 놓고, 핫하다는 안주 집에서 사케와 코스 안주도 한 잔 하고, 마스크팩 몇 장과 안주거리 몇 개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 우린 다 다르지만 똑같이 워킹맘이기에 사는 양상이 그리 다르진 않다. 누군가에게 아이들 케어를 맡기고 있고(엄마든, 친척이든, 시터든), 아이들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고(관심과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회사생활에서 겪는 고충도 있다.(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서로의 차이에 대해 조언은 하지 않는다. 우린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조언 따위, 또 다른 부담이 된다는 걸. 내가 시터 이모에게 불만이 있다한들,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건 그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친척이 아이를 돌봐주는 데 내년에는 헤어지겠다는 친구에게도, 그저 응원을 보낸다. 친정엄마가 봐주시는데, 드리는 돈을 줄이지는 못하겠다는 친구의 말에도 그저 공감을 표한다. 아이들 수업을 미처 못 챙기고 나왔다며 조마조마해하는 친구에게, 그저 토닥토닥한다.


서로에게 뭘 해줄 수가 있겠는가. 손을 보태지 못할 거면 입도 보태지 말아야 한다. 그저 마음만 보태는 게 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제 다들 육아 10년 차 넘어가다 보니, 각종 비난과 잔소리로 상처 받은 경험이 있어선지 서로 그런 부분을 알아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아는 사람들과 하는 대화는 즐겁다. 공감하고, 나누고, 공유하고.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다가, 가벼운 넷플릭스 드라마 보며 깔깔대다가, 마스크팩 하나 하고 10시에 잠들었나 보다.




다음날 오전, 친구들은 시가에 가야 한다며, 아이 맡겨놓은 친정집 가서 점심 먹어야 한다며 하나하나 떠나갔다. 나는 집에다 5시에 들어오겠다고 이야기해 두었기에 퇴실하는 오후 4시까지 뒹굴 참이다. 친구들이 가고, 넷플릭스에서 이것저것 뒤적대다 워킹맘의 애환을 그렸다는 'Bad Moms'라는 영화를 골라 보기 시작했다.


아침 챙기랴, 애들 챙기랴, 회사 가랴 정신없는 워킹맘의 아침. 주인공 에이미는 혼이 빠지고 엉망이 되었는데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회사에서도 돌아오는 건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난뿐이다. 기껏 학부모 회의라길래 바쁜 시간 쪼개서 왔더니 빵 바자회에서 유해물질 넣지 말자는 캠페인이라는 것에서 에이미는 폭발하고 만다. 에이미와 함께 Badmom이 되기로 결심한 세 엄마는 슈퍼마켓에서 난동을 부리고, 차려입고 핫한 클럽에 가서 남자를 꼬시려고 해 본다. 엄마의 일탈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지. 이건 Bad Mom이 아니라 그냥 Bad인걸. 나도 집 나와서 1박 외박 중이니 Bad Mom이려나.



아무튼 에이미는 애들 숙제 대신해주던 것도 하지 않고, 아이들 아침도 더 이상 차려주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받던 회사에다가는 시간제 근무자에게 일을 더 시킬 거면 돈을 더 줘야 했다고 할 말을 한다. (아마도 이 부분이 Bad man 아니고 Bad Mom을 표현한 부분이려나)

보다 보니 어쩜, 나도 그런데 싶다. 숙제는 당연히 아이들이 해야 하니까 해준 적이 없고, 아침도 잘 차려주지 않고, 회사에서는 여차하면 애 때문에 휴가 내는 불량 직원이다. 이게 Bad Mom이라고? 나는 이미 Bad Mom이 되고도 넘치겠네!


이후 이야기는 늘 그렇듯 에이미가 고난과 역경을 겪다가 결국 학부모회의 회장도 되고, 아이들은 오히려 스스로 숙제하고 엄마 아침을 해주기까지 하는 착한 아이가 되었으며, 멋진 남자 만나고, 해고된 직장에서도 좋은 조건으로 복직하게 해 준다는 그런 스토리다. 보면서 정말, 이것은 영화다 싶었다. 학부모회 회장 선거까지 신경쓸 틈이 정말로 없고, 아이들은 어느 정도 알아서 하긴 해도 관리의 부실은 사방에서 나곤 한다. (그때마다 자괴감이 드는 건 덤이고) 회사생활? 회사 다닌 지 15년이 넘는데, 직장에서 나 같은 워킹맘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 본 적이 없다.


하룻밤 꿈같은 1박을 보내다가 영화를 보며 현실로 복귀한다. 뭐, 별거 있겠나. 현실 속 워킹맘 라이프는 불쌍하기 그지없다. 아이들을 봐주는 분(시터든, 친정엄마든)의 심경까지 살펴야 하고, 아이들도 세심히 관찰해야 하고, 집안일에서도 신경을 놓을 수 없고, 남편과의 관계도 챙겨야 하고, 회사일도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이 모든 걸 파업해야 Bad Mom 아닐까. 현실 속 우리들은 하나를 하느라 다른 걸 못해서 동동거리면 동동거렸지 다 집어 치겠다고 손을 놓지는 않는다. 엄마라는 자아 때문인지 사회적 시선 때문인지 어쨌거나 남아있는 책임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나쁘다기보다 안쓰러운 것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다.  


영화 속 Badmom들이 투쟁을 해서 얻어낸 건 겨우 남편도 아이를 같이 보기 시작했다는 것, 회사에서 기존에 하던 일의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것, 아이가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치열함의 결과가 참 소소해서 슬프다. 이게 무슨 Bad mom이야, Poormom이지.  


덧. 엄마로 복귀한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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