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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Aug 19. 2019

이사의 추억

이사가 잦으면 짐이 점차 간소해진다.

우리 집은 유난히 이사를 많이 다녔던 기억이다. 언제고 어머니께 우리는 왜 그렇게 이사를 많이 다녔냐고 여쭈어보니, 다 아버지의 일 때문이었다고 설명해 주셨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정을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에 알게 된, 잦은 이사의 진실은 실제로 아버지 때문인 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국민학생 때 계산동을 시작으로 만수 3동, 만수 5동, 만수동의 대토단지, 다시 만수 5동, 그리고 만수 5동 내의 빌라들로 두어 번. 총 예닐곱 번의 이사를 하느라 '동네 친구'라고 불리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초, 중, 고등학교의 같은 반 친구들이거나 학원 친구들이 전부였다. 동네 친구가 없다는 사실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긴 했지만 외아들이라 외로움을 많이 타, 학교에서 친한 친구들을 많이 만든 게 어느 정도 도움은 됐다. 아버지는 대부분의 나날을 출장으로 보내셨고 어머니는 집에 계시거나 식당 일을 하시거나 아는 먼 친척 네 집에 가서 파출부 일을 하셨다.


당신의 젊은 시절에 할 일이 없어, 30대 초반에 용접 일을 배우셨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한다. 용접 기술을 배우시고 곧바로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다고 들었다. 두 분께서 결혼하시기 전의 이야기는 고증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계시지 않아서 그전의 이야기는 모른다. 어쨌든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시고 1년쯤 뒤에 나를 낳으셨다고 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현재보다 혈기가 더욱 왕성하시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엔 술이 인생의 전부였기에 어머니께서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심지어 어머니께서 나를 낳으신 날에도 어딘가에서 술을 드시고 몇 달 동안 나타나질 않으셔서, 나의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증 상의 생일의 갭이 상당히 있다. 그 정도로 술을 사랑하시던 당신이시니 제대로 된 급여를 집에 가져다주지 않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아마 평생일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우리 집은 이사를 수도 없이 많이 다녔어야 했다. 분명히 맨 처음 우리가 살던 계산동의 아파트는 대출인지 뭔지로 생긴 돈으로 구입했던 집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걸 처분해 버리고 조금 더 싼 전셋집, 그리고 외할머니를 모시는 조건으로 한국은행에 근무하시는 외삼촌에게 도움을 받아 구입한 빌라, 다시 그 빌라를 세를 주고 인근의 주택가에서 어머니께서 오픈하신 슈퍼마켓에 딸려있는 작은방, 슈퍼가 망하고 다시 돌아온 삼촌 돈의 빌라, 외할머니를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어 삼촌 돈으로 구입한 빌라를 팔아, 삼촌에게 돈을 돌려준 뒤 새로 이사한 전셋집, 그리고 아버지 명의로 대출을 받아 구입한 4천만 원짜리의 빌라까지. 계산동의 아파트에서 만수 3동의 소방서 앞에 있던 집에 처음으로 이사를 한 뒤부터 축구에서 티키타카를 하듯, 만수동 인근에서만 이사를 계속한 것 같다. 이유는 늘 아버지, 그리고 돈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전혀 몰랐지만 돈이 없으면 친척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하고 친구, 지인들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세 식구가 20여 년 동안 살아진 게 신기할 정도로 아버지는 돈에 대한 미련이 없었고 어머니는 돈에 대한 미련만 있으셨다. 어린 시절에 이사를 많이 다닌다는 게 초, 중, 고등학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성격이나 가치관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부모들이 알 턱이 없던 시절이었고, 아이들 인성이야 가만히 놔두면 자연스레 스스로 무르익던 시대였다. 덕분에 국민학교 전학을 세 번 정도 했다. 계산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동부 국민학교, 만수 국민학교, 마지막으로 인수 국민학교까지. 계산 국민학교에서 1~2학년을, 동부 국민학교에서 3학년을, 만수 국민학교에서 4학년을, 인수 국민학교에선 다행히 5~6학년을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인수 국민학교를 졸업한 친구 몇 명은 아직까지도 연락이 닿고 있고 가끔 얼굴을 보며 지내곤 한다. 정말 다행히,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전학을 한 번도 다니지 않고 졸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꽤 파란만장한(?) 이사 경험과 가정사를 지니고 있는 삶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부모님께 단 한 번 대든 적도, 반항을 한 기억도 없다. 가출을 했던 적도 없었으며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담배나 술을 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마 내가 그냥 맹하고 평범한 녀석이라서 그랬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순수하고 순진했다기보다는 집에서 20년 동안 보고 자란 게 아버지의 술과 담배였는데 그 맛없고 독한 걸 따라 하느니 차라리 다른 걸 하자고 다짐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도 친가 쪽 친척 형 누나들은 나를 보고 참 의아해 한다. 어떻게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느냐고. 아마 노 씨 집안의 내력 같은 거라서 담배는 몰라도 술 쪽은 여전히 주당들이시다. 가끔 술을 잘 마시고 싶다는 생각도 대학생 때 분명했었으나 나중 되니까 차라리 못하고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지금은 다행히(?) 어머니께서는 지긋지긋한 이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인생을 살고 계시고 아버지께서는 옛날에 지은 죄(?) 때문인지 2년여마다 한 번씩, 아니면 3~4년마다 한 번씩 간석동 인근에서 꾸준히 티키타카 중이시다. 하지만 그 몹쓸 잦은 이사의 DNA가 나에게 인장처럼 남아버렸는지, 이미 충분히 지겨울 정도로 이사를 해대고 있다. 이 이사의 사슬을 확 끊어버리고 싶은데 생각처럼 잘 안되는 걸 보면서 우리 부모님도 나 같은 심정이었나라고 자문하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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