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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Aug 13. 2019

날강도

그 검은 패딩은 잘 살고 있을까?

'가챠폰(우리나라 말로 캡슐형 자동판매기)' 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던 시절, 어머니께서 가끔 주신 용돈 천 원을 들고 문방구에 가서 동전으로 거스른 뒤 100원을 넣고 레버를 돌려 장난감이 나오는 기계가 좋았다. 기계인 주제에 수동으로 움직인다는 구조도 좋았고 무엇보다 안에 어떤 내용물이 들어있는지 전혀 모르고 구매한다는 게 나름 스릴 만점이었다. 자동판매기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은 대부분 쓸모없고 허접한 장난감들이었지만 그 시절의 나에겐 사활이 걸린 뽑기였다. 일명 '짱깸뽀' 라고 불리던 가위바위보 코인 머신도 엄청 흥했었고 동네를 돌며 코흘리개들에게 몇 백원을 받고 말을 태워주는 리어카도 인기였지만 나에겐 오직 캡슐 자동판매기가 단연 으뜸이었다. 특히 기계 안에 들어있는 캡슐들이 거의 바닥이 나는 타이밍에 문방구에 들를 때면 이번 타이밍에 나올 장난감이 무엇인지 얼추 실루엣이 보이기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장난감과 중복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대개는 기계를 좌우로 흔들거나 해서 캡슐을 다시 섞는 방법을 썼지만 이내 문방구 주인아주머니께 들켜 혼이 나곤 했다.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듣거나 어쩌다 아버지가 출장 후 챙겨주시던 몇 천 원의 용돈이 어린 시절의 나에겐 힘이요 꿈이요 행복이었다. 돈의 개념도 잘 모르던 시기라서 오천 원이 세상에서 가장 큰돈이라고 여기던 무렵, 한 여름의 대낮에 어머니께서 아이스크림을 사오라며 오천 원을 건네주셨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도 남은 돈으로 문방구에서 원하는 걸 사오라고도 하셨다. 무슨 생일인가 싶었지만 지금 기억해 보면 당신의 자녀가 돈에 대한 개념이 있는지, 상거래를 직접 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는지가 궁금했던 일종의 테스트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한다. 어찌 됐든 가장 높은 가치의 지폐를 손에 든 나는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다. 개발도 덜 된 인천 변두리의 소도시라서 집과 슈퍼는 거리가 꽤 있었지만 오천 원을 팔랑거리며 신이 나게 깡충거리며 뛰어갔던 기억이다.



집과 슈퍼, 그리고 문방구 사이에는 계산 국민학교라는 곳이 있었고 학교 앞은 대로변이었는데 아직 개발이 한참이나 덜 된 상황이라 인도 대신 비포장길이었던 게 아직 눈에 선하다. 무더운 여름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신나게 슈퍼와 문방구 쪽으로 손에는 오천 원을 들고 깡충거리며 뛰어가고 있었는데 불현듯 뒤에서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움켜잡는 걸 느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뒤에서 나를 잡고 있는 어떤 남자의 힘과 공포심 때문에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한 여름에 감기 몸살이 왔었는지 검은색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이윽고 나의 목 전체를 자신의 팔 하나로 헤드록을 하듯이 뒤에서 조르면서 칼 비스름한 걸 내 허리께에 들이댔다.



"오천 원 내놔."



엄청난 공포였다. 아직 국민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에게 한 여름에 검은색 패딩을 입은 힘이 센 어떤 성인 남성이 아이 손에 들고 있는 오천 원을 빼앗으려 흉기를 챙겨, 뒤에서 졸졸 따라왔다니. 요즘에야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애들 코 묻은 돈을 흉기까지 들이대면서 뺏겠냐 싶지만 그 당시엔 CCTV의 개념도 없을 때고, 경찰이고 치안이고 영 엉망이었던 시절이었다. 안 그래도 깡총거리느라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 긴장감과 놀라움이 뒤섞여, 숨이 가빠졌다. 이내 더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물을 질질 흘리며 오천 원을 패딩에게 맥없이 건네주었다. 패딩이 오천 원을 받아드는 순간 나의 목을 조르고 있던 헤드록이 풀렸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패딩이 들고 있던 흉기는 다름 아닌 손톱깎이였다. 손톱깎이를 잘 보면 중간에 칼처럼 생긴 기다란 도구가 하나 있는데 그걸로 내 허리춤을 찌르고 있던 거였다. 어린 마음에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이미 공포심이 내 마음을 실컷 억누른 다음이라, 패딩에게 뭐라 말은 못 하고 엉엉 울면서 패딩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패딩은 씨익 웃으며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서 열심히 뛰어갔다. 한 여름에 패딩을 입은 것도 좀 웃긴데 꼬맹이 돈을 뺏고 전력을 다해서 도망가는 모습이 퍽 괴이하고 볼썽사나워서 '저런 녀석에게 돈을 뺏기다니'라고 생각하며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당연히 어머니께서 다시 오천 원을 주실 줄 알았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참아가며 다시 오천 원을 달라는 눈빛으로 어머니께 상황 설명을 했지만 '어떤 놈이 감히 우리 장군이 용돈을 뺐어갔어?!'라는 말만 되풀이하실 뿐, 새로 오천 원을 주시지는 않으셨다. 아이스크림도 날아가고 장난감도 허공으로 사라진 날이었다. 이후 다음부터 다시는 깡패에게 걸리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달리기를 열심히 연습했다. 계산 국민학교 앞, 그 비포장길 인도는 늘 뛰어다녔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분했으면 아직도 그 패딩이 떠오른다.



한 여름의 개발이 덜 된 계산 국민학교 앞 인도에서 손톱깎이 하나로 내 오천 원을 훔쳐 간 검은 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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