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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군 Aug 19. 2019

과도한 음주는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정신건강에 해롭습니다.

예전엔 술을 참 잘 마셨다. 대학생 때만 해도 전공을 살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빠져 살았다. 선배고 후배고 동기고 다들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제 할 말만 하며 지냈다. 차라리 철학과였다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는데 문예 창작이라서 술자리에 모인 사람 수만큼의 생각과 자기주장이 넘실댔다.



턱걸이(대기 1번)로 겨우 들어간 인천의 작은 전문대에의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마신 술이 내 생에 첫 술이었다. 분명 다들 거나하게 취하지 않은 게 분명한데 똥 군기 좀 잡겠다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배 하나가 내 앞에 앉아, 재떨이에 소주를 따라서 나에게 건넸다. "저는 술 한 번도 안 마셔봤는데요."라는 말이 눈치 없이 내 입에서 나가자, 눈을 부라리며 "요즘 세상 좋아졌다.", "야, 내가 신입생이었을 땐 말이야~"라는 말이 내 귀에 날아와 박혔다.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고 동기였던 친구 한 명이 선배에게 웃으며 "이 친구가 좆밥이라 아직 술을 못해요, 선배님~"라면서 내 앞에 있던 재떨이 술잔을 다 비워버렸다. 그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 선배에게 뭔가 미안한 마음, 그리고 대학은 원래 이런 곳이라는 생각이 교차하며 그날은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버렸다.



그 뒤로 학교에 가는 길목에서 틈만 나면 등교하고 있는 신입생들을 붙잡아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는 선배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나도 언제까지나 그들을 피해 갈 수는 없어서, 마지못해 몇 번 참석했던 술자리에서 그렇게 어이없게 술을 배웠다. 술이 딱히 나쁜 건 아니지만 보고 자란 게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의 모습들 뿐이니 좋게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약주를 좋아하시던 우리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내 생일이 봄 즈음이라 동기 녀석들은 당연히 생일 전날, 생일 축하를 빙자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학교에 들어가고 딱 두 달 뒤였던 내 생일이었는데 이렇다 할 고민 없이 자리에 참석했던 기억이 나니, 나는 이미 술을 열심히 먹고 다녔었나 보다. 생일 축하주라면서 친구들이 맥주 500cc 잔에 소주와 맥주를 섞은 술을 다섯 잔 정도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연이어 다섯 잔을 모두 비워냈고 급속도로 술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술을 전혀 못하는 사람은 술이 몸에 받지 않는다거나 조금만 많이 마시면 금세 먹은 걸 확인하니, 결국엔 술을 못 마시게 되는 건데 그래도 젊었을 때라고 열심히 들이부을 수 있었나 보다.



결국 꽤나 취기가 올라왔던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살면서 '취했다'라고 인지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고로 얘기하자면 나는 술이 센 게 아니라 적당히 조절해 가면서 안주빨을 세우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가 봐도 말술을 할 것 같은 덩치를 하고 있다며 술을 권할 때가 많은데 지금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으니 가끔 골치가 아프기도 하다. 아무튼 엄청 취했던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서럽고 속상한 게 있었는지 엉엉 울면서 친구들 한 명 한 명 붙잡고 안겨 울었던 기억이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진상 짓을 했던 일이라 아직도 내 생일날의 대낮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대부분의 남자 동기들은 생일이니 이해해 주자며 토닥여줬었고 대부분의 여자 동기들은 징그럽다며 도망갔다.



이게 내가 진짜 취한 모습 중 하나다. 대체적으로 취하면 만사가 귀찮아져, 바로 잠들어버리는 스타일이라 그날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아마 학교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없는 나를 떠올리며 서러워서 운 것 같다. 그 뒤로는 술을 마시고 아무리 취해도 운 적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 술을 마시면 금세 달아오르는 체질이라 굉장히 숨이 가빠지거나 화가 나거나 한다. 그래도 지금껏 술을 마시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몹쓸 짓을 한 기억은 없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무렵엔 아버지처럼 취한 꼴을 어머니께 보여드리기 싫어서 밤을 새워서라도 술이 깨고 집에 들어갔다.



요즘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별로 없거니와 사회 풍토가 예전과는 많이 바뀌어서, 억지로 부하직원에게 술을 권하는 시대도 아니고, 다음날 숙취를 얼싸안고 출근하면 자기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며 핀잔을 듣기 일쑤이니 일부러라도 술을 마시지 않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아버지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것 같아서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라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술이 당긴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뿐.



가끔 술을 잘 마시며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열심히 챙겨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긴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술은 맛이 없다. 태생이 안주빨을 세우는 먹성이라, 술자리에 자주 가면 살만 더 찌고 못쓴다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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