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군 Aug 19. 2019

노긍정

긍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긍정이란 무엇일까. 철학사전에서는 '사물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승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어릴 적에 본인에게 끼친 주변 환경들이 가치관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를 기르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존재해주는 것만으로 감사한 집에서 태어났다 보니 사물이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어릴 때엔 부모님께서 빚을 내서라도 나에게 좋은 걸 사 입히려 노력하셨고 혼자 독립하고 나서부터는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삶을 지향하는 중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들 중에 무엇 하나 충족되지 않는 삶을 살아본 적도 있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도 거의 평생 받아봤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얼만큼 지켜가면서 세상과 타협하느냐, 그 틈에 보이는 작고 보잘것없는 행복감을 얼마만큼이나 고양시키느냐가 아닐까 생각된다.



대학 입학 전에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는 전무했다. 소위 지잡대라고 불리는 학교들에서도 나를 받아줄리는 만무했고 대학 면접과 소집일에 응했음에도 탈락되던 게 일쑤였다.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있을 대학 입학까지 근 한 달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2월달은 왜 30일도 채 되지 않는 것인가!) 세 군데의 학교에 지원하고 면접을 봤지만 다 탈락됐다. 앞으로 대학이든 기업이든 왜 탈락됐는지 탈락자에게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면 참 고맙겠다. 그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돈이 많아서 이름 없는 대학에 운동장이라도 기부하며 입학할 수 있는 집이 아니었고 연줄이 좋아서 누구 빽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집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잘 되겠지'라며 기도하며 기다렸다. 결국 인천에 있는 아주 작은 대학의 대기 1번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받은 인천대 합격 통보 전화로 인해 그 사람 대신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동기나 선배의 이름과 얼굴은 전혀 모른 채 학교를 가게 됐지만 노 씨 집안 2세들 중에 대학 문턱이라도 들어가 본 유일한 녀석이 되었다.



아마 이때부터 대책 없이 긍정적인 성격이 뿌리내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기 싫어하던 군대도 '어떻게든 살아서는 나오겠지'라는 심정으로 입대하였는데 다행히 온갖 자질구레한 질병도 다 완치하고 제대했다. 특히나 성격 면에서 전국의 내로라하는 또라이들이 수십 명씩 모여 생활하는 군대의 특성상 소심하고 무뚝뚝했던 습관이 세심하고 쾌활하게 변모했다. 군대를 상당히 잘 다녀온 케이스 중에 하나인데 최전방의 GOP에서 생활하다 보면, 그리고 사회생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에서 맨 밑 계급부터 한 분대를 책임지는 분대장 역할까지 하고 나면 소심한 성격이나 외골수 같은 꽉 막힌 습성 같은 건 저절로 다 치유되기 마련이다.



그 뒤로 나의 삶은 늘 '긍정' 이 함께한 느낌이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닥쳤을 때도 '잘 되겠지'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버텨나갔다. 다만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던 삶이라서 신앙을 기초로 한, 초월적인 존재에 무턱대고 기댔던 게 대부분이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서 새로 만나신 아저씨 댁에서 몇 개월 지낼 때에도, 지낼 곳이 없어 외할머니께서 혼자 살고 계신 집에 갔을 때에도, 외삼촌이 외할머니 댁에 왜 들어가 사냐며 노발대발하여 연수동의 무보증 반지하 집에 들어갔을 때에도, 전공인 문예 창작을 살릴 기회가 없어 온갖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그때에도, 벼룩시장을 통해 호텔에 들어가 제대로 된 돈벌이를 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호텔에서 몇 년 간 구르다가 문득 '이 일을 나이 먹고 하긴 싫다'라는 생각에 무작정 포토샵을 배웠을 때에도, 그렇게 배운 포토샵으로 디자인 일을 하게 됐을 때에도, 외삼촌이 추천해준 한국은행에 들어갔을 때에도, 비정규직이라는 굴레와 주변 사람들의 텃세에 한국은행을 박차고 나왔을 때에도, 기껏 다시 찾아준 쇼핑몰 사장님께서 권고사직을 통보했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 특정한 직업 없이 근 4개월 동안 생활하고 있을 때에도 '잘 되겠지'라는 생각 하나로 버티고 있다.



다만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까 대책 없이 '잘 되겠지'라는 긍정적인 생각만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기도의 힘으로 마냥 손 놓고 있으면 퍽이나 잘 되겠다'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엔 늘 무언가를 하고 있고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손을 뻗고 있다.



언제나 마음 편히 지내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마음 편히 먹자고 스스로를 위안했을 뿐. 돌이켜보면 지금보다 더 숨이 차고 더 위급할 때가 많았다. 나의 앞길은 모두 나 하기에 달려있다는 말도 맞는 말이지만 그 시작은 무조건적인 긍정과 작은 것에 대한 감사이다. 원래 세상은 부조리하며 개개인을 놓고 보면 멀쩡해 보이지만 집단으로 놓고 보면 편협하고 이기적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 '전부' 속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 키를 잡아가며 생존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왕 살아가는 거, 바보 같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소신을 지키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82년생 노현균


작가의 이전글 첫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