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충격적인 실화
- 방사능 수치는?
- 시간당 3.6 뢴트겐 입니다.
- 약한 것도 강한 것도 아니네?
방사능 수치는 3.6 뢴트겐입니다. 일단 그건 엑스레이 수준이 아닙니다. 4백배는 되죠. 제가 걱정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 입니다. 이건 소형 방사선량계의 측정가능 최대값입니다. 그냥 나온대로 숫자를 부른 겁니다. 진짜 수치는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맞다면 이 소방관은 손에 엑스레이를 4백만 번 맞은 겁니다.
RBMK 반응로는 우라늄-235를 연료로 씁니다. 우라늄-235 원자는 총알 같은 겁니다.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며 경로 내의 모든 걸 통과합니다. 나무, 금속, 콘트리트, 살점도요. 우라늄-235 1그램에는 이런 총알이 10의 21제곱 개도 넘습니다. 1그램에요. 체르노빌에는 3백만 그램이 있습니다. 그게 모두 발사된 겁니다. 방사능 입자는 바람에 실려, 전 대륙으로 퍼질 겁니다. 빗물에도 섞일 것이구요. 10의 27제곱 하고도 3을 곱한 만큼의 총알이 우리가 숨쉬는 공기중에, 마시는 물에, 먹는 음식에 들어갑니다. 대부분의 총알은 1백년이 지나도 안 멎을 겁니다. 일부는 5만년은 갈 것입니다.
바이오 로봇을 쓰는 겁니다. 사람이요.
소련의 우월한 핵산업에 의문부호란 있을 수 없겠죠.
우리가 살고있는 이 나라는 엄마를 살리고자 아이가 죽는 나라예요. 협상은 집어치우세요. 우리 목숨도 집어치우시고요. 누군가는 진실을 말해야 해요.
우리가 있는 이 곳이 바로 위험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밀과 거짓 때문입니다. 그게 저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불쾌할 때, 진실의 존재를 잊을 때 까지 우리는 거짓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의 모든 거짓은 진실에게 빚을 집니다. 언젠가 그 빚은 갚게 됩니다. RBMK 반응로는 그렇게 폭발하는 것입니다. 거짓 때문이죠.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순진해진다는 것이다. 진실을 찾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진실을 원하는 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을 잊고는 한다. 그러나 진실은 늘 어딘가에 존재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아도. 진실은 우리의 필요와 바람에, 체제와 이데올로기와 종교에도 관심이 없다. 진실은 숨어서 언제나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체르노빌의 진실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한때 나는 진실의 대가가 두려웠으나, 이제 다만 묻는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야말로 충격적인 실화다.
미국 HBO 에서 제작한 구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태를 재구성한 미니 시리즈 드라마다. 엔간한 영화보다 더 충격적이고 굉장히 사실에 입각한 묘사, 캐릭터 정립, 다큐멘터리보다 더 다큐같은 연출 덕분에 드라마 다섯 편을 보는 내내 소름이 돋는 경험을 쭉- 했다. 엄청나게 잘 만든 드라마이고 체르노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꼭 봐둬야 할 작품이다.
1986년 4월 26일,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현재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사상 최악의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있었다. 레벨 7로 규정된 원자력 폭발사고였는데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 역시 레벨 7이다.
체르노빌 발전소의 부소장인 '아나톨리 댜틀로프(폴 리터)'의 지휘아래 특별한 실험이 진행중이었다. 그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 줄 수 있는가?' 였다. 실험 조건으로는 정격출력 22~33%인 700~1,000 MW 에서 100%의 출력을 22~33%까지 낮추기 위해 제어봉을 삽입하는 거였다. 이 실험이 실시된 이유는 원전의 안전장치구조가 완비되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원전을 설비할 때 완료했어야 할 실험이었지만 공산권 특유의 '승리적인 조기달성' 을 위해 실험을 완료하지 않을채로 원전 완공 선언을 하였고 관련자들은 이미 훈장까지 받은 상태였다. 관련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번 실험을 완료 해야 했다.
정확하게 체르노빌의 원전이 왜 폭발했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진게 없다. 미드 체르노빌은 여러 가설들 중 '제논 가설' 을 채택하여 극을 꾸몄다.
3,200MW 로 운행중이던 원전을 700 MW 까지 낮추는게 실험의 시작이었지만 1,600 MW 에서 장시간 전하여 실험 조건과 다른 환경이었고 원자로 운전수의 조작 미스로 700 MW 가 아닌, 30 MW 까지 낮아지면서 원자로 내부의 균형이 깨지고 중성자를 흡수해 버리는 '제논-135' 가 쌓여갔다. 제논-135는 우라늄-235의 핵분열로 발생하는 '아이오딘-135'가 붕괴하면서 생산되는데, 중성자를 흡수해서 제논-136이 되든지, 아니면 붕괴해서 세슘-135가 된다. 원자로를 고출력으로 운전하면 아이오딘이 많이 생성되고 시간이 지나면 제논으로 변해서 중성자를 흡수해 버리지만, 고출력 운전이므로 제논이 그만큼 중성자를 빨리 흡수하는 까닭에 큰 문제가 안 된다. 30 MW 까지 출력이 떨어져도 아이오딘과 제논의 생산 또한 30 MW 로 운전하는 만큼만 나오므로,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30 MW 로 떨어지기 이전, 1,600 MW 로 출력하면서 축적되었던 아이오딘이 문제다. 이 아이오딘은 계속 제논으로 붕괴하는데, 제논이 중성자를 흡수하는 속도는 30 MW 출력 수준으로 느려졌으므로 축적되는 것이다. 한 편 1,600 MW 로 저출력 운전하는 도중 제논-135 이 쌓이면서 출력이 통제를 벗어났다는 가설로 드라마를 만들었다.
당시 발전소에 있던 원전 운전사들은 낮아진 출력을 올리느라 제어봉을 수동으로 빼내게 되었고 그 사이 급수 펌프까지 가동시켜 노심 압력을 올리고 수동 제어봉을 6개만 남긴채 전부 뽑게 된다. 규정상 최소 수동 제어봉은 15개였고 15~16개에서 RBMK 원자로를 가동시키는게 일상이었다. 댜틀로프는 실험 메뉴얼만 읊던 상태라서 원전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몰랐다. 실험자들은 200 MW 까지 끌어올린 출력으로 실험을 시작했고 안전장치를 가동한채 제어봉을 삽입한다. 노심 중단에 축적된 제논에 의해 중성자 반응 분포는 물로 가득찬 상단과 하단에 쏠려 있었다. 물은 중성자를 잘 흡수하기 때문에 그동안 끓어오르면서도 핵 연쇄반응을 잘 억제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안전장치 가동으로 제어봉이 내려오면서 흡수재 역할을 하던 물이 밀려가고 감속재인 흑연이 들어가자 노심 하단의 중성자 연쇄반응이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활성화 된다. 원자로를 꺼야 할 안전장치가 오히려 중성자 반응을 늘리고 출력을 올려버리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써 체르노빌 원전은 정상 출력의 10배인 30,000 MW 까지 출력이 올라가고 내부의 열이 과하게 상승하면서 핵연료봉이 파손되고, 달아오른 핵연료와 물이 서로 접촉하면서 한꺼번에 끓어올라 증기폭발을 일으켰다는 '가설' 로만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를 분석하고 있다.
어찌됐든 그 날 폭발한 체르노빌 원전에서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400배가 넘는 방사능 물질이 누출되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전례없는 최악의 사고도 역사에 남게된다.
드라마의 도입 부분, 사건 당시 '원전 지붕에 불이 났다' 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 '바실리 이그나텐코(애덤 네가티스)' 는 물로 불을 꺼가면서 주변에 떨어진 부드럽고 검은 물체에 관심을 갖는다. 아니나다를까 그 물질은 원전에서 폭발한 흑연 조각이었다. 그 조각을 만진 사람의 손이 두꺼운 소방용 장갑을 낀 상태에서도 심각한 화상을 입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만 결국 방사능 피폭이 심해,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의 부인이었던 '류드밀라 이그나텐코(제시 버클리)' 는 상태가 심각해진 남편을 따라 모스크바까지 따라가지만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간 남편이 남긴 아이 역시 출산한지 4시간 만에 사망하는 등 체르노빌의 악몽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일반인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살아있는 실존인물이다(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들까지 출산하여 잘-?- 살고 있다고 함).
체르노빌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여 실전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물로 '발레리 레가소프(자레드 해리스)' 가 등장한다.
그는 드라마 체르노빌을 이끌고 가는 주역이며 실제로 KGB와 연관된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여러 증거들을 남기고 자살을 택한다. 작중에서 그를 도와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퍼붓는 소련의 장관회의 부의장이자 연료동력부 장관인 '보리스 셰르비나(스텔란 스카스가드)'는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발레리에 비해 현실적인 관점에서 사고를 수습하려 노력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처음엔 그저 자신에게 부담이었던 발레리가 눈엣가시였지만 발레리의 논리와 과학적 지식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국민을 위한 행동들을 옆에서 봐오며 보리스 역시 조금씩 마음이 변해간다. 또한 KGB에서 시시각각 발레리의 목을 조여오는 걸 목격해온 뒤로, 발레리에게 굉장한 용기와 힘을 실어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미드 체르노빌에서 유일하게 허구의 인물로 만들어진 인물은 '울라나 호뮤크(에밀리 왓슨)'.
연구소에 날아든 방사능 물질을 판별하여 곧장 체르노빌로 날아가는 멋진 여성이다. 소방관들이 원전 지붕에 붙은 불을 끄려고 뿌린 물을 덮으려 모래를 헬기로 5천톤이나 쏟아부은 발레리에게 '원전 용암이 지하수에 침투해, 근처 강까지 방사능으로 오염되는 꼴을 보고 싶으냐' 라고 말하며 상당히 엘리트적이고 냉철한 역할을 한다. 그 당시 체르노빌에 모여 자신들의 지식을 나눠가면서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모든 과학자들을 상징적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제작진이 밝혔다. 레가소프와 마찬가지로 KGB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소장인 '빅토르 브류하노프(콘 오닐)', 그리고 원전 사고에 대한 책임을 댜틀로프에게 미루는 '니콜라이 포민(에이드리언 롤린스)' 등 사건의 주범격인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들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원전 사고보다 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드라마 후반부에, 소련이 그렇게 싫어하던 미국에게 싫은소리 하면서 빌려온 로봇과 자신들의 달탐사 로봇을 (폭발하지 않은)원전 옥상에 올려, 폭발한 원전 아래로 흑연 조각을 떨궈야 했는데 로봇 속에 들어있던 칩이 다 타버릴 정도로 방사능 수치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결국 택한 건, '바이오 로봇' 이었다. 사람들에게 방사능 보호복을 번갈아서 갈아입히며 한 사람당 90초 정도의 시간 동안만 흑연을 삽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로 소련 전국적으로 60만명의 사람들을 징집했고 남아있는 가축을 죽이는 일과 방사능 수치를 재는 일을 주로 시켰다.
드라마에서 보면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다비드 덴시크)' 가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에 대해 주변국들, 그리고 우방국, '적국' 에게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라며 분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당시 공산당 최고 권력자의 위엄(?)과 자신들 손으로 저지른 사고로 인해 세계적으로 핀치에 몰리게 된 소련의 속사정을 잘 보여준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자체가 굉장히 공포스럽고 드라마틱한 면이 없잖아 있어서, 기본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 드라마지만 실존했던 인물들과 배우들의 미친 싱크로율, 그 당시 소련의 미술, 건축물, 심지어 타고 다니는 자동차까지 극세사처럼 복각해낸 HBO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 드라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사고가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작된 드라마다' 라고 체르노빌을 소개하면 그대로 믿을 정도.
HBO의 드라마는 열에 아홉은 명작이라고 하는데 드라마 체르노빌은 명작의 기준을 훌쩍 넘어선 드라마다. 앞으로 HBO에서 만드는 드라마가 조금이라고 내 흥미를 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찾아서 보게될 듯.
포스팅 초반부에 원자력에 대해 샬라샬라 어려운 말을 잔뜩 써놨지만 드라마를 보면 그 날 체르노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마지막 5부에서 발레리 교수가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 때문.
(나도 원자력의 'ㅇ' 도 몰랐는데 미드 체르노빌을 보고나니 'ㅇ' 정도는 알겠다)
드라마에 나온 것들 중 '죽음의 다리' 운운하던건 다 거짓이라고 한다. 1부 다리 위에서 체르노빌 원전 폭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지 않았다고... 발전소 내부를 드나들던 사람들,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 개개인의 피폭 정도가 다 달라서 누구는 생존했고 누구는 사고 며칠만에 죽고 그랬단다.
HBO의 미드 체르노빌을 보고나면 이윽고 우리의 주변국인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바로 떠오른다. 영원히 방사능이 뿜어져나오고 있는 체르노빌인데 일본 바로 옆에 위치한 우리는 이미 다 조금씩 피폭됐을 듯. 일본 불매운동이 한창이라 다들 눈치보면서 일본 여행을 안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일본 여행 경비가 똥값이라며 룰루랄라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생각났다.